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42년 대구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들 중에는 막내였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유일한 동생이다.
그는 경남 의령 친가에서 할머니 손에 자라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야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47년 사업 확장에 나선 아버지와 함께 상경해 1947년 혜화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1세(초등5년)였던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듣고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첫째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도쿄대학 농과대학에, 둘째 형인 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이 와세다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건희 회장은 둘째 형과 같이 지냈다고 한다.
어린시절에는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에 푹 빠져 살았다. 유학 시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애완견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1979년에는 일본 세계견종종합전시회에 순종 진돗개 한 쌍을 출전시키기도 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사대부고에 다닐 때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했고 전국대회에 출전해 입상하기도 했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연세대에 합격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로 진학했다. 1965년 대학 졸업 후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인 1967년 결혼했다.
1970년대에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견학하며 신산업 진출에 대한 사업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한국반도체 인수를 아버지에게 건의했지만 거절당하자, 자신의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그는 실리콘밸리를 50여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 이전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256메가 D램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1977년 니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 발표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후계자로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의 집무실 바로 옆방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이 회장이 친형들을 제치고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6년 이건희 회장이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한 그해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졌고 친형들인 이맹희, 이창희씨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이병철 회장은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했다. 한국비료는 지분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후 당시 36세였던 이맹희씨가 총수 대행으로 10여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는데, 그룹이 혼란을 겪자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시련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당시 민영화 추진하던 유공(대한석유공사) 인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 최종인수자로 선경이 선정되면서 이건희 회장은 실패의 쓴맛을 봐야했다. 유공 인수 실패 이후 한동안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1982년에는 푸조 승용차를 몰고 양재대로를 달리다 덤프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차 밖으로 튕겨 나간 이 회장은 외상이 심하지 않아 2주 만에 회복했다.
그가 그룹 경영을 맡은 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삼성은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에 올랐다.
그러나 1993년 미국 LA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삼성 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는 것을 목격했고,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해외주재원 등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모아 신경영을 선언했다. 1995년 8월 삼성 휴대폰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폰 업계 1위였던 모토롤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은 국내 1위에 올라섰다. 당시 한국은 모토롤라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이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21세기 초일류 기업을 달성하기 위해 ‘삼성 디지털 경영의 원년’으로 선언했다.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각오로 사업구조, 경영관점과 시스템, 조직문화 등 경영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주문했다.
이 회장은 생전 공식 석상에서 두 번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기소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 회장은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제품 중 11개가 세계 1위인데 1위는 정말 어렵다. 그런 회사를 만들려면 10년, 20년 갖고는 안된다”고 말을 이어가다 목이 메었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2011년 7월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확정 발표를 듣는 순간에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건희 회장에게 건강 문제가 찾아왔다. 1999년 11월이 회장은 폐 부분의 림프암이 발병해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이후에도 매년 겨울이면 기후가 따뜻한 해외에서 지내며 건강관리를 해왔다.
2014년 5월에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졌다. 당시 이 회장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았다. 장기 입원치료를 받으며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