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우리나라 경제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아주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를 찾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한때 삼성과 자동차 산업을 놓고 사활을 걸고 싸웠던 국내 2위 그룹을 이끌고 있는 후배 기업인이 ‘1등 DNA를 심어줘서 감사하다'는 추모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해외 시장 등에서 조롱거리였던 현대·기아차 역시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 속에서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 1위(2분기 영업이익 기준)를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25일 타계한 이 회장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이건희 1등 정신은 삼성그룹뿐 아니라 우리 산업과 사회 전반에 자긍심을 불어넣고, 동시에 자극제가 됐다”며 추모하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고 있다. 한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신세계그룹도 “고인은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식에서 보드에 '새로운 신화 창조'라고 서명하는 이건희 회장./삼성전자 제공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 회장이 남기고 간 ‘1등 정신’이라는 유산을 되새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고 이 회장에 대해서는 그룹 지배 구조, 비자금·노사 문제 등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의 별세를 계기로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는 “최근 코로나 사태 등 경제 위기 상황과 말[言]의 향연만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기업인과 일반 시민 모두 ‘우리도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실천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추모 분위기가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삼성(이건희 회장)을 저평가하지 않았나 되새겨 볼 일이다.”

“한국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어준 삼성, 지금 한국의 위상은 삼성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희 추모 멘트

온라인상에서도 고(故)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겁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경영 능력이 재조명받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의 별세 사실이 알려진 25일 오전 10시부터 이날 오후 4시까지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된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약 18만개에 달했다. 한 사건에 대해 10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그동안 온라인 댓글 특성상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틀간 달린 댓글의 80~90%가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을 둘러싼 각종 수사, 압수수색, 재판 관련 뉴스만 접하며 자라온 청년들이 지난 이틀간 고 이 회장의 업적을 다룬 기사들을 보며 젊은 시절 그의 기업가 정신에 열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은 그를 ‘현대판 이순신’에 비유하며 구국의 영웅으로 칭하고 있다.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는 "이 회장의 세계적 영향력은 세종대왕보다 낫다. 한글이나 금속활자를 칭송해 봤자 한국 안에서의 일인데, 세계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친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것이야말로 위인으로 칭송받을 일”이라고 썼다.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도 “이 회장은 국민장(葬)해줘야 한다.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 수십조(원)를 끌어올린 사람”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은 “기업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4차 산업 시대에 희망이 있다”고 추모했다.

대구 삼성상회 옛터에서 추모식 - 26일 오후 대구 인교동(현 성내3동) 삼성상회 옛터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추모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거리 곳곳에 추모 현수막을 걸어 고인을 기렸다.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본금 3만원을 갖고 시작한 무역회사다. 이건희 회장은 이곳에서 200여m 떨어진 이병철 회장의 고택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동환 기자

시민과 네티즌들은 이 회장이 만든 ‘1등 기업 삼성’ 덕분에 세계에 나가 당당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썼다. 특히 많은 시민이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이 회장의 어록을 거론하며 “2류는 1류가 되기도 하는데, 4류는 5류, 10류로 떨어지고 있다"고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한 네티즌은 “해외에 나가 보면 태극기보다 더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 삼성의 로고며 광고였다. 자랑스러운 기업을 일구는 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기업을 지원하는 일, 이런 게 바로 나라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내 각 계열사 소속 직원들도 사내 온라인망에 마련된 온라인 추모관에서 2만개(오후 3시 30분 기준)가 넘는 댓글을 달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이끌었을 때 한국 경제가 도약하고 성장하던 시기였고, 한국 경제성장에 삼성전자와 반도체 사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지금도 그런 기업과 산업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추모 열기가 더욱 확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 정·관계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고 이 회장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결과 한국도 미국·일본·독일 등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그의 공을 평가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추도사에서 “이건희 회장이 걸었던 길은 불굴의 개척 정신으로 초일류 기업을 넘어 초일류 국가를 향한 쉼없는 여정이었다”면서 “우리 후배들은 회장님의 그 큰 뜻을 소중히 이어받아 일등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도 조문을 마친 뒤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며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였다”고 말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자 시절 고 이 회장을 만난 일화를 언급하며, “당시 이 회장은 ‘난 지금 반도체에 미쳐있다’고 말했다. 오늘의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사랑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