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어느 날, 이건희 삼성 회장은 독일로 출장을 가던 길에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는다. 테이프는 삼성사내방송(SBC)이 제작한 시리즈물의 1편이었다. 질 경영을 강조한 회장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공장의 불량 공정을 보여주며 반성하자는 내용으로, 사내에서는 6월 초 방영됐고 출장 중인 이 회장에게는 인편으로 전달됐다.
테이프에는 삼성 세탁기 공장에서 뚜껑이 잘 맞지 않는 불량품이 발생하자 직원들이 뚜껑 부분을 칼로 깎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이 장면을 보고 5년 이상 질 경영을 강조해왔는데 아직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격노한다. 이어 과거의 양(量) 위주 인사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
이 회장은 독일에서 서울의 이학수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1시간 동안 화를 낸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서곡(序曲)이다. 자신이 그렇게 수년간 강조했던 품질 경영, 양보다 질 위주의 인사가 왜 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타로 통화는 시작된다.
“한 공장에서 열 대라도 나오면 죄악이야. 세탁기 깎아내는 거, 그런 라인은 완전히 스톱을 해야지 왜 깎는 거냐고. 라인 1~2주일 스톱시킨다고 생산 80%씩 날아가나? 아니잖아. 왜 양만 생각하고 만들어 재끼냐고. 불량품 내놓고 덤핑하고. 그런 거 산 사람들 이제 절대 삼성 거 안 산다는 거잖아. 팔면 팔수록 이미지 나빠지고 장사는 더 안 되는데 그렇게 단순한 계산이 안 돼?”
이 회장은 “무조건 양보다 질에 더 높은 인사고과를 줘라” “양은 당분간 버려도 된다” “시장점유율 떨어져도 되니 질에 자신 없으면 공장을 멈춰라, 손해는 내가 책임진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한다.
“점유율 떨어져도 좋으니 일본 수준으로 탄탄하게 고장 안 나게 만들고 덤핑하지 말고 현금으로 제값 받고 팔란 말이야. 이거 안 되면 삼성 절대 안 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월간조선은 12월호에 고(故)이건희 삼성 회장의 업무지시 육성테이프 30개를 단독 입수해 보도한데 이어, 1월호에는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담기 위해 제작한 테이프 10개를 추가로 입수해 그 내용을 소개했다. 이 테이프는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이 회장의 경영철학을 전파하기 위해 비서실이 제작한 것이다. 이 회장이 사장단 회의, 경제연구원 회의, 금융서비스사장단회의, 신임임원 교육 등 사내에서 한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60분에서 120분 분량이다.
◇”중역 의자는 치우고 사원 휴게실 안락의자 더 좋은 걸로 갖다둬”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했던 이 회장은 10개의 테이프에서도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했다. 그가 변화를 강조하는 바탕에서는 단순히 삼성의 발전 뿐 아니라 나라·민족의 발전을 위하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삼성 회장이 뭐가 답답해서 변해야 된다고 하겠느냐고. 3대가 먹고살 게 있는데 왜 이렇게 밤새 고함을 지르고 있겠어. 우리나라의, 민족의, 삼성의 미래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내 재산 5%, 10% 느는 게 무슨 상관있냐고. 죽을 때까지 1000억, 2000억원 못 쓴다고. 보석 사고, 차 사고? 그건 돈이 이동하는 거지 쓰는 게 아니잖아. 재산 5000억이 1조 되는 게 무슨 뜻이 있겠어. 재산이 1억에서 2억 되는 건 큰 차이가 있겠지만 1조에서 2조 되는 건 뜻이 없어.”
“지금 우리 나이, 40~50대가 변하느냐,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류국가냐 이류국가냐가 판가름 나는 거야. 1950~1970년대에서 조금 늦는 거하고 1990~2000년에 조금 늦는 건 차원이 달라. 지금 늦으면 완전히 기회상실을 하는 거라고. 이런 걸 알면서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이건희 회장은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임원의 말에는 이렇게 답한다.
“어떻게 바뀌냐고? 쉬운 거부터 바꿔봐. 수영을 시작하든 잠을 한 시간 줄이든. 방법을 알려줘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고, 자기가 안 변하려는 사람은 죽어도 못 변해. 자기 의지라고.”
이 회장은 말단 직원의 만족도를 챙기는 시대를 앞선 경영자이기도 했다.
“대리, 차장급보다 말단 사원들의 분위기가 중요해. 사람은 감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윗사람 지도력에 의해서 많이 좌우된다고. 비서실도 종업원 사기를 최우선으로 두고 방안을 생각해 봐. 공장 현장의 중역들은 상무건 전무건 의자도 싹 치워버려. 권위주의가 눈에 보이면 사기가 오르겠냐고. 중역 의자는 치우고 사원들 쓰는 휴게실 안락의자는 더 좋은 걸로 갖다둬.”
◇이건희의 반도체와 박정희·박근혜 부녀 인연
이건희 회장은 그룹 임원들에게 ‘업의 개념’을 중시하며 회사의 시작과 역사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애착이 지극했다.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삼성이 반도체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여러 차례 설명한다. 한국에 반도체 조립회사가 생긴 것은 1960년대 말로, 아남산업과 금성사는 외국의 반도체 조립기술을 배워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생산 회사는 1974년 1월 설립된 한국반도체다. 미국에서 온 강기동 박사(삼성반도체 사장 역임)가 설립자이지만 그 뒤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가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 과정에서 전자공학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66년 미국 모토로라 투자단으로 한국에 온 강기동 박사를 만나게 된다. 강 박사 등은 박 대통령에게 반도체 조립공장을 설립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이에 매료된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딸 박근혜를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시킨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부녀와 인연을 맺어온 강 박사는 한국으로 와 한국반도체를 설립한다. 박근혜의 서강대 스승인 임모 교수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며 투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반도체는 설립한 지 몇 개월 만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을 처지가 된다. 이때 이 회사에 주목한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그는 삼성 임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반도체가 어떤 경위로 생겨서 오늘날 이렇게까지 됐는지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지. 시작은 74년에 부천에 강(기동) 박사라는 사람이 세웠는데 자금이 없어서 공장을 세워두고 문 닫을 판이었어.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박근혜 스승이 부탁한다며 한국반도체에 100억 넘게 투자를 했다더라고. 과잉투자가 돼 있어서 겁을 내서 아무도 못 사는 형편이었어. 삼성전자 돈으로는 살 수가 없는 거야. 내 개인 돈도 넣고 그랬어. 3~4년 계속 적자 났지. 강진구 회장(신경영 당시 삼성전자 회장)이 붙어살면서 다 만들어놓은 거야.”
이 회장은 “첨단산업은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도 정부에다 맡겨놨으면 지금 아무것도 아냐. 대통령이 과잉투자하고 아무도 손 안 대려는 거 내가 선대(이병철) 설득해서 사 온 거야. 처음엔 반도체가 뭔지도 정확히 몰랐는데 투자를 계속하다 보니 앞으로 이익이 계속 날 거라는 예측이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