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사 54주년을 맞는 국내 재계 서열 5위 롯데그룹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실적과 주가(株價), 디지털 대응, 상품·브랜드 인지도 등에서 ‘삼중고(三重苦)’의 수렁에 빠져 있어서다.

무엇보다 실적 부진이 심각하다. 이달 15일 종가(終價) 기준으로 롯데그룹 시가총액(時價總額·주가를 상장주식 총숫자에 곱한 금액)은 2019년 말 대비 8% 증가했다. 똑같이 ‘코로나 19’ 직격탄을 맞은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은 같은 기간 시가총액이 두자릿수(35~85%)로 불어났다. 코스피지수가 40% 정도 오른 걸 감안하면 참담한 성적표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2021년 1월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 마련된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1주기 제단(祭壇)에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롯데, 10대그룹 중 ‘나홀로' 시가총액 감소

10대 그룹으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작년 1년 동안 10대 그룹의 시가총액은 약 42% 증가했지만 롯데는 유일하게 감소(-2.24%)했다. 이달 28일 현재 시가총액 30위권 안에 삼성그룹 8개사, SK그룹 5개사, LG그룹 4개사, 현대차그룹은 2개사가 포진해 있지만 롯데그룹 계열사는 전무(全無)하다. 시총 50위 안에 롯데케미칼(34위) 1개사 뿐이고, 100위권에는 롯데지주(82위)와 롯데쇼핑(94위) 2개사만 추가된다.

더 큰 문제는 그룹의 삼각 축(軸)인 유통과 화학, 호텔(면세점 포함) 부문 모두 구조적 부진 상태라는 점이다. 2017년 206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뒤 2020년까지 4년째 적자(赤字) 상태인 롯데쇼핑의 작년 1~3분기 누적 매출액(12조2285억원)은 전년 동기 대비 8% 감소했다. 같은 기간 신세계그룹 이마트의 매출(15조5353억원)은 5.9% 증가한 걸 보면, 외부 요인 탓만 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2006년 2월 상장 당시 40만원에 달하던 롯데쇼핑 주가는 현재 10만~11만원대로 4분의 1 토막 났다.

롯데그룹 주력사 중 하나인 롯데케미칼 울산 공장 입구/조선일보DB

롯데케미칼은 2011년 이후 약 10년간 연간 매출액이 15조원 안팎에 정체돼 있고, 지난해 7조원 규모의 일본 히타치케미칼 인수에 실패했다. 경쟁 상대이던 LG화학이 2차전지 같은 신성장 동력 발굴에 성공해 시가총액 3위 기업으로 도약한 것과 대비된다.

◇외부는 악재와 급변 연속...대응은 ‘거북이 걸음'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과 브랜드 매력도도 경쟁사 보다 부진하다. 롯데그룹이 3조원을 투자해 작년 4월 내놓은 모바일 통합앱 ‘롯데온(ON)’의 지난달 기준 월간 사용자 수(112만명)는 쿠팡(2141만명)의 5.2%에 불과하다.

그래선지 “3년 안에 확실한 방향을 못 잡으면 롯데가 5년 안에 재계 10위는 고사하고 2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잊혀진 기업이 될 것”(대형컨설팅사 고위 임원·S대 경영대 교수 등)이라는 경고가 최근 시장에서 확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롯데그룹에는 반도체나 전기차 배터리, 수소차, 바이오(bio)가 없다. 최근 3~4년 사이에 굵직한 인수합병(M&A)이나 판을 바꾸는 대담한 진출, 신세계의 라이프스타일 센터 모델 프로야구단 인수 같은 스마트한 선택도 보이지 않는다.

수년째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일본 제품 불매→코로나 19 같은 외부 악재가 잇따르고 언택트(untact·비대면) 확산 같은 디지털 급변(急變)이 벌어지는데, 대응은 ‘거북이 걸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홍대순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롯데의 경우 아날로그 중심의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조직 문화가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를 못 쫓아가는 형국”이라며 “미래 먹거리는 확보 못했는데 기존 먹거리는 점점 줄어드는 절체절명(絶體絶命·궁지에 몰려 막막한 처지)의 시간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위기는 2015년부터 4년 가까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간의 형제 경영권 분쟁으로 잠복되고 누적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로 인해 그룹 내 혁신 역량이 소진되고 위기의식이 둔감(鈍感)해지면서 사업 재편과 혁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롯데가 그룹의 디지털전환 핵심사업으로 꼽은 '롯데온(ON)'/조선일보DB

◇신동빈 회장의 승부수는 ‘쇄신'과 ‘신성장 동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인력 및 조직 쇄신’과 ‘신성장 동력 육성’이란 두개의 승부수로 분전(奮戰)하고 있다. 신 회장은 이달 13일 열린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우리의 잠재력을 시장에서 인정 못받고 있다. 미래 관점에서 비전을 수립하고 각자의 업(業)에서 1위가 되기 위해 필요한 투자를 과감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롯데알미늄이 지난해 1100억원을 들여 헝가리에 전기차용 배터리 양극박 생산공장을 세운 것을 이날 예로 들며 “새로운 먹거리를 위한 과감한 투자”라며 이례적으로 공개 칭찬했다.

작년 8월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을 용퇴시키고 후임에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사장을 임명하는 등 2년 연속 큰 폭의 임원 물갈이와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BCG(보스턴컨설팅그룹) 출신의 외부 인사도 영입했다. 백화점·마트·슈퍼 등 전체 오프라인 매장의 30%에 이르는 200여개 점포를 향후 3~5년 내 닫아 효율과 수익성 제고를 정조준하고 있다.

롯데정밀화학은 최근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동박(銅箔·copper foil) 제조사인 두산솔루스에 재무적 투자자로서 3000억원을 투자했다. 롯데케미칼은 고부가(스페셜티) 제품 진출을 위해 일본 화학기업 쇼와덴코의 지분 추가 매입과 JSR의 합성고무 사업부 인수를 추진 중이다. 미래 신성장 동력 확보에 시동(始動)을 건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임직원이 합심해 수익성 위주의 강도높은 구조조정과 효과적인 투자를 한다면, 올해에 롯데그룹 실적이 크게 개선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 잠실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내부 모습/조선일보DB

◇“관료화, 순혈주의 버리고 혁신적 기업문화 절실”

롯데그룹은 국내에서 11만 4000명을 직접 고용(간접고용까지 포함하면 36만명)하고 있다. 이런 롯데의 장기 부진과 침체는 국민경제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롯데가 정상 궤도에 올라 부활하려면 과거와 결별하고 혁명에 가까운 ‘뼈를 깎는 변신’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전문가들은 상명하복(上命下服)으로 관료화되고 순혈주의가 지배하는 기업문화 개선이 특히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후진적 문화로 말미암아 그룹 내부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을 뿐 더러 입점업체 같은 사회적 약자들 위에 군림하는 이미지가 여전(如前)하다는 것이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소비자경제학)는 “신동빈 회장이 아무리 좋은 철학과 소신을 갖고 있어도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 문화에선 실행은커녕 제대로 내부 전파도 어렵다”며 “외부의 쓴소리를 수용하고 더 과감한 인적 쇄신으로 ‘실력’과 ‘창의력'을 최우선시하는 혁신적인 기업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전환 전략 선택하고 매진해야

세계 최대 오프라인 유통 기업인 미국 월마트는 모바일에서 주문한 상품을 받아가는 '픽업 서비스'와 아마존의 유료 프라임 서비스를 본따 이틀 내 상품을 무료로 배송해주는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결합하는 '딥 택트(deep tact) 전략'의 일환이다./조선일보DB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디지털 전환에선 ‘전략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e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인 제트닷컴 인수 등으로 디지털 변신에 성공한 월마트 사례와 롯데의 강점인 오프라인 소매 기업과 엔터테인먼트를 접목한 차별화 가운데 생존 전략을 선택해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부)는 “롯데그룹 총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소매업에선 네이버, 쿠팡, 아마존 같은 IT플랫폼 기업들이 세상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며 “절박한 위기의식으로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로 쇄신해야 롯데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