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계의 대표적인 1세대 경영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조선일보 DB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으니 “한국은 참으로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고 했다. 기업 규제가 많고 강성 노조가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정부는 툭하면 기업인들에게 형사 책임을 묻는다. 그러니 어느 기업인이 기업을 키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모험을 하겠느냐고 말했다.

홍성추 메가경제신문 대표이사 겸 발행인(64)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가 전문 저널리스트이다. 지난 1990년 신문기자로 현장을 뛸 때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한국 대기업의 창업자들을 만나 그들의 성공담을 듣고 경영 현장 모습을 지켜보면서 창업자 유전자(DNA)를 분석했다. 4차 산업혁명의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노조를 정치적 기반으로 둔 정부까지 만나 분투하는 대기업 3~4세 오너 경영자들이 이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그는 알고 있지 않을까?

홍성추 메가경제신문 대표이사

홍 발행인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창업과 수성에 성공한 할아버지 세대의 장점을 다시 새겨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재벌가 3~4세들은 창업자들과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자신의 핏 속에 숨어 있는 창업가 DNA를 되살려 역경을 이겨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위해 지난 2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걸어 메가경제신문 사무실이 위치한 ‘골든타워빌딩’에 도착했다. 홍 발행인의 16층 사무실에 들어가니 가까이에 경기대학교와 인창고등학교가, 저 멀리에 구름 조각 떠도는 푸른 하늘 아래 인왕산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만난 재벌가 창업자들

―대기업 총수 집안(재벌가) 연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1990년 서울신문 기자 시절에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 피플’에 ‘화제의 창업주’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 코너는 창업 회장들의 일대기를 연재하는 것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DNA를 갖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이 때만 해도 대기업 창업 회장들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코너를 만들기 위해 창업 회장들을 직접 만나면서 재벌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코너 연재가 끝난 뒤에도 계속 재벌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 글을 써 왔다.”

대기업 창업자들이 회원으로 참가해 재계의 목소리를 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서울 여의도 본부 건물./전경련

―예를 들어 어떤 창업자들을 만났나?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SK그룹 최종현 회장,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웬만한 창업자들은 거의 다 만나봤다. 다만 그 때 이미 작고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과 LG그룹 구인회 회장,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 한화그룹 김종희 회장, 금호그룹 박인천 회장은 만나보지 못했다.”

―만남은 주로 어떤 형태로 이뤄졌나?.

“다양하다. 1대 1로 만나 정식 인터뷰를 한 적도 있고,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은 인터뷰 기사를 싣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차 한잔 하는 형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우도 있다. 몇몇 기자들과 함께 만난 적도 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난 회장도 있다.”

재벌을 부정적으로 생각 안해

홍 발행인은 자신을 재벌가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2019년 8월부터 1년 6개월 째 유튜브 ‘홍성추 TV’에 ‘재벌가 이야기’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구독자가 2만2000명을 넘어섰다. 또 2016년에 창립된 인터넷 경제지 메가경제신문의 대표이사 겸 발행인을 맡아 기업인들의 창업 정신을 돕는 뉴스를 제작하고 있다. 재벌가와 기업인들에 대한 연구와 보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가 전문가라고 본인을 소개했는데, 재벌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나?

“나는 재벌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는 지적도 할 수 있지만, 한국 경제의 기반을 만든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등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1970년에 준공한 경부고속도로(오른쪽 사진). 당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왼쪽 사진)./조선일보 DB

―한국 재계는 지금 창업자의 손자나 증손자들인 재벌 3~4세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3세이고,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4세이다. 3~4세 시대는 이제 시작이니 이들의 공과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를 뛰어넘느냐 마느냐는 본인들의 성과에 달려 있는데, 지금까지 한 것만 놓고 판단하면 선대를 뛰어넘을 확률이 높지 않을 것 같다.”

한국 재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3~4세 경영자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조선일보 DB

외환위기 때 평가 받은 재벌 2세들

―재벌 2세들은 창업자들인 아버지를 뛰어 넘었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면서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 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만큼 사업가 DNA를 발휘해 회사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삼성전자
지난 2005년 '서울모터쇼’를 찾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맨 앞)이 출품된 차량을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다른 2세 경영자들은?

“2세들에 대한 평가는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이미 이뤄졌다. 당시에 무능한 2세들은 모두 몰락했다. 진로, 동아, 대농, 쌍용, 해태, 삼환기업, 삼부토건 등 쟁쟁했던 기업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망한 2세들의 공통점

―2세 때 망한 기업들은 원인이 무엇인가? 경영자의 개인적 결함인가? 아니면 시대적으로 경영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인가?

“변화된 시대 환경을 따라잡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주로 창업자들의 장점을 본받지 않고 나쁜 것만 따라하다가 망했다. 예를 들어 창업자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예외 없이 독불장군 같은 권위주의 스타일이다. 2세들이 맡았을 때에는 시대가 바뀌어 민주적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권위주의 스타일을 고수하다가 쌍용과 진로, 해태 등이 망했다. 쌍용은 자동차 사업을 고집하다가, 진로는 소주 외에 종합 그룹으로 사업을 확대하다가, 해태는 제과에서 시작해 중공업 등으로 진출하다가 망했다.”

창업자의 업적을 지키지 못하고 기업의 문을 닫은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왼쪽부터)./조선일보 DB

―창업자가 권위주의 방식으로 사업을 빠른 속도로 확장했으니 아들들이 그 방식을 따라 사업을 계속 확장하거나 유지하려고 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대기업 총수들은 사실상 ‘황제’이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황제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창업 과정의 어려움 없이 황제가 됐다. 창업자들과 달리 창업 과정의 어려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업종 진출이나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가 문제가 생겼다.

창업자들은 신사업을 할 때 자신이 직접 기술을 하나하나 연구해 습득했다. 그리고 직원들을 독려해가며 일을 벌렸다. 그러나 2세들은 기술 습득의 어려움은 모르고 아래 직원들을 독촉하고 밀어부치는 스타일만 배운 것이다.”

아버지 DNA를 반쪽만 물려받다

―아버지의 기업가 DNA를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망한 2세들은 아버지를 뛰어 넘겠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내실있는 사업을 하기보다는 아버지보다 기업의 외형을 키워 아버지를 뛰어 넘겠다는 생각만 했다. 욕심만 꽉차서 내실을 다지지 못한 바람에 망한 것이다.”

―외환위기가 2세 경영자들 평가에 결정적 기준이 됐다면, 코로나 사태가 향후 3~4세들에 대한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칠까?

“그럴 것 같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경제 재편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향후 그들의 평가에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더구나 창업자들은 주로 내수 시장에서 평가를 받았지만 3~4세들은 글로벌화가 진행된 까닭에 세계 시장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규모와 차원이 다르다.”

코로나 사태는 재계 3~4세 경영자들이 경영 능력을 평가받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지난달 28일 오전 광주 서구 한 고등학교에서 재학생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검사를 받고 있다./김영근 기자

창업자들의 5대 성공 요인

인터뷰 주제, 즉 3~4세들이 창업 1세대에서 배울 점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1세대 창업자들은 어떤 평가를 받았나?

“몇년전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한국 창업자 정신’을 이렇게 분석한 적이 있다.

한국 창업자에게는 5가지 정신이 있다. 첫째, 위험을 안고 창업에 뛰어드는 모험 정신을 갖고 있다. 둘째, 기발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셋째, 나도 할 수 있다는 ‘can-do’ 정신을 갖고 있다. 넷째, 위에서 결정해 아래로 지시하면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톱-다운(top-down)’ 일처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다섯째, 앞서 가는 기업을 따라잡으려는(catch-up) 정신을 갖고 있다. 한국의 창업자들은 이 다섯가지 정신을 갖고 기업들을 큰 그룹으로 성장시켰고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만들었다.”

―1세대 창업자들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해방 전후 일본의 적산기업들을 불하 받고 6·25 이후 전쟁 복구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많은 기업들 가운데 살아남은 기업들이 재벌이 됐다. 개발도상국 시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잘 살아보자’를 모토로 내걸고, 한편으로는 기업인들을 몰아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인들이 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줬다. 거대 기업이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도록 정부가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정경유착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이 이제는 60~8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3~4세들이 이 기업들을 경영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환희에 싸여 서울역 앞을 행진중인 서울 시민들./국가기록원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명동 거리(위)를 걷고 있는 피란민과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소총으로 무장하고 남하하는 북한 인민군./조선일보 DB

―창업자들에게서 배워야할 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30여년간의 재벌가 연구 경험에 근거해 판단해 볼 때 3~4세들이 본받아야 할 창업자를 꼽는다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다.”

4명의 창업자에 대해 한사람 한사람씩 차례로 물어보기로 했다.


개발도상기에 한국 산업의 틀을 만든 대기업 창업자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조선일보 DB

창업자 교훈 ① 정주영

: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력

―정주영 회장에게서는 어떤 점을 배울만한가?

“정주영 회장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도 그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창의적 기업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면?

“정 회장이 소양강 댐을 건설할 때 일본의 세계적인 댐 기술자 구보다가 일본의 철근과 콘크리트를 팔아먹기 위해 중력댐(콘크리트댐)을 짓자고 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강원도에 있는 흙, 자갈, 모래를 사용한 사력댐을 짓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경비가 30% 정도 절감된다고 했다.

당시 한국 경제학의 태두라고 불리던 태완선 경제부총리는 ‘사력댐이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다녔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이것을 성공시켰다.

서해안 서산 간척지를 만들 때 폐선으로 물막이 공사를 해 성공시킨 정주영 공법은 당시 전세계 건설업계에서 생각도 못하던 것이었다. 아무도 상상해 본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던 것을 성공시켰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84년 서산 간척사업 현장에서 공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정 회장을 직접 만나봤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

“어떤 어려운 이야기도 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92년 대통령 선거 후보에 나섰을 때에는 ‘반값 아파트’라는 공약을 내놨는데, 누구나 알기 쉬운 간단명료한 표현 아닌가? 절대 어려운 용어를 안쓴다. 정 회장은 이렇게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DNA 가장 잘 이어받은 정몽구 회장

―정주영 회장은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게 됐을까?

“타고 났다고 봐야 한다;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사람이다. 본인은 격물치지(致知在格物) 정신으로 열심히 사업 연구를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하지만, 그건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정 회장의 본능적인 감각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고 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할아버지의 이런 본능적인 감각을 물려 받았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정주영 회장의 아들 8명 가운데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이런 감각 DNA를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본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평소에 말을 할 때 주어와 술어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현대차 그룹을 키운 능력을 보라. 아버지의 사업 감각을 물려받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은 정주영 회장 비서실에서 오래 근무했던 사람이 나에게 했다.

현대그룹 2세들 간에 벌어진 ‘왕자의 난’(그룹 경영권 다툼) 때 정 명예회장이 자동차를 맡으면 망한다고 세간에서 많이 이야기 했으나 자동차그룹이 이렇게 큰 기업이 됐지 않은가? 아버지의 본능적 사업 감각을 물려받은 것이다.”

(필자는 정몽구 회장의 표현력과 관련된 체험이 있다. 지난 2006년 10월 미국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 기공식에서 정몽구 회장은 기자들의 첫 질문에 미리 생각한 서너 문장을 이야기 했다. 단어와 문장, 논리 구조가 매우 정확했으며, 짧은 몇마디에 필요한 핵심 내용을 모두 담아 추가 질문이 필요 없었다. 답변을 사전에 준비해서 그런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단명료했다. 선입견을 갖고 있던 기자들이 모두 놀라며 “정 회장 정말 말 잘하네”라고 입을 모았다. 그 날 정 회장의 발언 모습은 세간의 일반적 평가와 매우 달랐다.)

새해 첫 출근일인 지난달 4일 오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조 근로자들이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북구 현대차 명촌 정문으로 들어가고 있다./뉴시스

―정주영 회장의 생활은 어떠했나?

“정 회장이 1992년에 국민당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서울 청운동 자택을 기자들에게 개방한 적이 있다. 새벽 4시에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청운동 자택에 모였다. 4시 30분에서 5시 사이에 2층 식당 테이블에서 정 회장이 아들들과 같이 밥을 먹었는데 별로 말이 없었다. 이야기가 있어도 주로 정 회장이 했고 자식들은 한 두마디 하는 정도였다. 아버지의 권위에 지식들은 고개를 못드는 분위기였다. 그 날은 다섯째 아들인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회장이 ‘(국민당) 대표님, 9시 뉴스 봤더니 헤어스타일이 약간 이상했습니다’라는 이야기 한마디 했다. 정주영 회장은 성질이 급해서 그런지 밥도 10여분만에 후닥닥 다 먹었다.”

창업자 교훈 ② 이병철

: 철저한 사업가 정신과 미래 예측

―두번째 창업자 사례를 꼽는다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못만나봤지만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은 사업이 된다고 판단하면 철저하게 해서 이뤄낸 사람이다. 예를 들어 자기 사돈이었던 LG그룹이 전자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전자사업이 향후 유망업종이라고 판단되자 뛰어들어 경쟁을 했다. 그만큼 사업가 정신이 철두철미했다. 대기업 창업가들 가운데 사업가 정신이 가장 철저했던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오늘의 삼성그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을 쪼개서 자녀들에게 나눠주는 대신, 셋째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 모두 물려주는 방식으로 그룹을 유지시켰다. 그의 사후에 이건희 회장이 제일제당은 큰 형, 제일합섬은 둘째 형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제일모직을 가졌다. 큰 누나에게는 전주제지, 막내 여동생에게는 신세계 백화점을 줬다.”

1976년 12월 7일 삼성본관 3층에 설치된 삼성그룹 종합전산실 가동식에서 이병철 회장(가운데)과 이건희 당시 이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조선일보 DB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본받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철저한 관리기술과 예측 능력이다. 지금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반도체 사업도 처음 시작은 할아버지가 했다. 이후 아버지가 과감하게 반도체 투자를 하면서 한국이 일본을 능가했다.”

창업자 교훈 ③ 신격호

: 안전관리와 고품질

―세번째 창업자 사례를 꼽는다면?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을 꼽고 싶다. 정주영 회장이 중후 장대한 기업을 창업해 한국 제조업의 토대를 만들었다면, 신격호 회장은 한국 서비스 산업의 질을 높인 사람이다. 제과업에서 작게 시작했지만, 백화점과 호텔업의 수준을 끌어 올리고 서비스 문화를 바꾸었다.”

지난 2017년 5월 신격호 롯데총괄회장이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을 방문해 지시를 하고 있다./뉴시스

―신격호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철저한 안전관리와 고품질 서비스, 제품의 질, 이렇게 3가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신 회장은 안전관리에 철두철미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하면서 경영을 했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롯데월드가 오전 10시에 개장하기 전에 사장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2시간 반동안 몸소 시설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겼다. 매일 그 일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업종이라서 그렇게 안전관리에 철저하게 신경을 쓴 덕택에 하루에 수천명 수만명의 사람이 몰려도 롯데월드에서 큰 사고가 별로 없었다.”

신 회장은 또 대부분 소비재를 판매했기 때문에 고품질 서비스, 제품 우선주의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짜장면 하나라도 음식이 맛이 있으면 고객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그 식당을 찾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제품의 질을 강조하면서 롯데 왕국을 만들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아버지만큼 사업을 꼼꼼히 챙기고 있나?

“코로나 사태가 유통업계에 최대의 위기인데 아버지만큼 꼼꼼히 챙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롯데 계열사들이 사드(고고도 미사일 체계) 사태 때 중국의 압박을 받아 철수하는 것을 보면 회사 경영이 쉽지는 않은 듯 하다.”

신격호 회장을 이어 롯데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신동빈(왼쪽 세 번째) 롯데그룹 회장./조선일보 DB

―신격호 회장은 만나보니 어떤 사람이었나?

“매우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한국말은 알아듣기는 하는데 잘 하지는 않았다. 통역이 있었다. 일본어를 더 편하게 생각했다.”

창업자 교훈 ④ 조중훈

: 선택과 집중

―네번째 창업자 사례로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꼽았는데 어떤 이유인가?

“조중훈 회장은 인천에서 트럭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고, 월남전에서 트럭으로 미군 포탄을 실어 나르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정부가 적자인 대한항공을 인수하라고 해서 인수해 키웠다. 이후 한진해운도 만들어 키웠다.

조 회장은 수송 외길을 걸어왔다. 한진그룹을 하늘-땅-바다를 모두 아우르는 수송제국으로 만들었다. 전세계에 한국의 수송망을 뚫는데 전력을 기울여 한국 수출을 끌어올리는데 한몫했다. 정주영 회장이 중후장대한 사업, 이병철 회장이 첨단과학 산업, 신격호 회장이 서비스 산업에 올인했다면 조중훈 회장은 수송의 외길에 올인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사람들 덕택에 한국이 6·25 이후 세계적인 경제강국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가 제주 비행훈련원을 방문해 조종훈련생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다./한진그룹

―그러나 대한항공과 한진택배는 살아남았지만, 한진해운은 파산했지 않은가?

“박근혜 정부 때 한진해운이 망했다. 지금 해운업이 호황을 맞아 배가 없어서 난리인 점에 비추어 보면 현대상선과 쌍벽을 이루던 세계 7위 해운회사를 날린 것은 너무 단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조중훈 회장이 살아 있었다면 한진해운이 그렇게 없어졌을까?”

집무실에 걸려 있던 놀라운 세계지도

―조 회장과 관련되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1990년대 중반에 조중훈 회장 집무실에 갔을 때였다. 집무실 벽에 커다란 세계지도가 있었는데 대한항공과 한진해운의 배들이 움직이는 항로와 해로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현재 전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항공기와 배들이 깜빡이는 불빛으로 표시되어 이동하고 있었다. 대한항공의 비행기, 한진해운의 배가 세계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회장이 직접 집무실에서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는 전세계의 하늘과 바다, 땅에 한국의 수송망을 구축하는 꿈을 추구했다.사진은 전세계 하늘을 누비는 대한항공 여객기./조선일보 DB

―창업자들을 만나 보면 대체로 어떤 스타일이 많은가?

“기(氣)가 매우 센 사람들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확신에 차 있다. 말에 힘이 있고, 일단 말을 시작하면 달변인 경우가 많다.”

―재벌가를 살펴 보면 창업자 세대부터 형제들 간에 분쟁도 많았다.

“창업자 가족 간에 분란이 많았던 집안은 후대에 와서도 가족간 분란이 일어나더라. 뛰어난 사업 DNA 처럼 분쟁 DNA도 상속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재벌가 3~4세들이 부족한 점

창업자들의 교훈에 대한 질문이 끝났다. 3~4세들은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창업자들의 사업과 경영 능력에 비추어 볼 때 3~4세들은 어떤 점을 더 보충해야 하나?

“3~4세 정도 되면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고급 과외를 받고 유학도 갔다 와서 제왕학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업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은 이론이 아니다. 실물이다. 임기응변에 능해야 하고 감각이 있어야 한다. 도전하고 모험할 줄도 알아야 한다. 창업자들은 이런 것을 갖췄는데, 3~4세들이 이런 것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그들이 창업가들의 이런 DNA를 갖지 못했으면 사업은 정체하거나 망하거나 할 것이다. 요즘은 기업 트렌드가 워낙 빨리 변하기 때문에 조금만 삐끗해도 망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창업 세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그러나 3~4세는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업자의 유산을 물려받아 갖고 있다. 따라서 미래예측을 빨리 하면서 변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경제 흐름을 빨리 예측해 밀어부쳐야 한다.”

정치 환경은 창업자 때보다 나쁘다

―창업자 세대와 비교하면 지금 3~4세들이 사업을 확장하기는 국내 여건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규제가 많고 강성 노조도 있어서 기업가들이 사업을 확장하기 어렵다. 정치가 잘못된 것이다. 창업자 세대에 비하면 정치 환경이 매우 나쁘다. 기업을 물려받았으니 할 수 없이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조업 분야에서 예전의 창업 1세대와 같은 거대 그룹이 나오기는 힘든 정치적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치적 지지기반인 노조의 편을 들어 기업 경영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정책을 잇따라 펴고 있다. 지난 2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영상으로 열린 제 5회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뉴시스

―예전 창업자들은 기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의 ‘기업보국’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3~4세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3~4세들도 이병철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 같은 기업보국 정신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없는 3~4세라면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경영에 나서서는 안된다. 국가의 엄청난 경제적 자원이 낭비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뒤에 자기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대주주로 남아야 한다.”

큰 기업가가 되려면

어떤 사람들은 정경유착을 들어 재벌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큰 돈을 버는 기업가나 재벌이 되고 싶은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의 꿈이기도 하다. 그래서 3시 30분쯤에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30여년 동안 재벌 총수들을 만나 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큰 기업가가 되려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병철 회장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회장은 큰 기업가가 될려면 운(運)-둔(鈍)-근(根) 3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 운이 따라야 한다. 둘째, 우직하게 일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셋째, 악착 같은 근성이 있어야 한다. 큰 재(財-부자)는 하늘에서 내린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재벌가 전문 저널리스트인 홍성추 메가경제신문 발행인이 지난 2일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현재 재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재벌가 3~4세 총수들이 창업자들에게서 배울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기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