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대 적자와 1조원대 흑자’.
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4사가 지난해 정유 부문과 윤활유 부문에서 기록한 실적을 합한 것이다. 작년 국내 정유업계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지만 윤활유 사업이 크게 선전하며 정유사들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윤활유 사업이 정유업계에서 ‘비밀 병기’로 주목받는 이유다. 정유사의 윤활유 사업은 ‘지크’(SK이노베이션), ‘Kixx’(GS칼텍스), ‘에쓰오일 7’(에쓰오일), ‘엑스티어’(현대오일뱅크) 같은 자동차용과 산업용·선박용 제품뿐 아니라 윤활유 원료(윤활기유)까지 포함한다. 정유사 전체 윤활유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윤활기유가 80~90% 정도로 훨씬 크다.
◇정유 부문 5조원 손실, 윤활유 1조원 이익
지난해 국내 정유 4사는 역대 최대 규모인 총 5조979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정유 4사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정유 부문에서 전체 영업 손실이 5조7275억원에 달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여파로 휘발유·경유 등 석유 제품 수요가 급감한 데다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원유 재고 평가 손실이 불어나면서 적자 폭이 커졌다. 작년 12월부터 국제 유가가 본격적인 오름세로 돌아선 것도 실적 악화를 부채질했다. 원가(원유)는 상승했는데 코로나 재확산으로 석유 제품 수요는 금방 회복되지 않으면서 정제 마진(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비·운영비 등을 뺀 것)마저 악화됐다.
하지만 윤활유 사업을 놓고 보면 얘기가 180도 달라진다. 지난해 정유 4사가 윤활유 부문에서 거둔 영업이익은 1조457억원으로 집계됐다. 윤활유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채 안 되지만 정유 부문에서 발생한 손실을 상당 부분 메운 것이다.
◇원가 경쟁력과 친환경 수요 증가
정유업계가 지난해 윤활유 사업에서 높은 영업이익을 올린 배경은 우선 높은 마진율이다. 윤활유 원료는 휘발유·경유 등을 생산하고 남는 기름(잔사유)을 재처리해서 만드는데, 작년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 윤활유 원료를 싸게 뽑아낼 수 있었다. 작년 두바이유 가격은 연평균 배럴당 42.29달러로, 전년 대비 33.4% 떨어졌다. 반면 윤활유 가격과 판매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정유사 관계자는 “자동차용 윤활유는 휘발유나 경유처럼 자주 넣는 게 아니어서 코로나 여파로 차량 운행이 줄었다고 해서 소비량이 큰 폭으로 줄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친환경 흐름도 윤활유 판매 증가에 한몫했다. 유럽 등에서 점차 강화되는 환경 규제에 따라 연비 강화와 탄소 배출량 저감 효과가 있는 윤활유 수요가 증가했다. 지난해 국내 정유업계의 윤활유 수출(1742만배럴)은 전년 대비 9.5% 증가했다. 시장분석기관 IHS마킷에 따르면, 글로벌 친환경 윤활유 시장은 2025년까지 연평균 13%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정유업계는 친환경차용 등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특히 국내 정유업계는 전기차에 최적화된 윤활유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전기차 윤활유는 기존 내연기관차용과 달리 전기·전자 부품의 부식 방지와 에너지 손실 최소화, 출력 저하 방지 등 다양한 기능을 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현재 전기차에 들어가는 윤활유 시장이 연간 15%씩 성장하고 있어 업체마다 이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며 “이 밖에도 풍력발전 터빈용 등 친환경 관련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전 세계적인 ‘탄소 중립’ 흐름과 친환경차 확산 움직임 속에 정유업계가 기존 석유 사업만으로는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며 “정유업계가 비(非)주력 사업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활기유
휘발유·경유 등을 생산하고 남은 값싼 찌꺼기 기름을 재처리해서 만드는 윤활유의 원료. 여기에 첨가제를 넣어 자동차·선박·기계용 윤활유를 만든다. 윤활유는 연비 개선, 자동차 배기 시스템의 수명 연장 등의 기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