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 재건축 건설 현장 건너편 한 공터에 철제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작년 8월까지만 해도 주유소였던 이곳에는 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인근 주유소 관계자는 “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기름 넣는 사람이 줄었다”며 “반경 2km 안에서 10개가 넘는 주유소가 치열한 가격·서비스 전쟁을 벌이던 상황에서 코로나로 손실이 불어나 폐업을 고민하는 곳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과열 경쟁으로 경영난을 겪어온 주유소 업계가 지난해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구조조정 바람에 휩싸였다. 21일 한국석유공사와 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문을 닫은 주유소 수는 2019년의 두 배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SK에너지·GS칼텍스·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 등 국내 4대 정유사 간판을 단 주유소 수는 20년 만에 1만개 밑으로 떨어졌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안정적인 수입원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주유소가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주유소 폐업, 전년 2배
지난해 말 기준 전국 주유소는 1만1402곳(알뜰주유소·자가상표주유소 포함)으로 전년보다 96곳 줄었다. 2019년 폐업한 주유소는 49개였다. 4대 정유사 브랜드 주유소 개수는 2019년 1만140개에서 지난해 9992개로 줄어 2000년 이후 처음으로 1만개를 밑돌았다. 코로나 여파로 차량 운행이 줄면서 국내 휘발유와 경유 소비량(389억L)은 전년 대비 3.7% 감소했다. 친환경차 확대 추세도 주유소의 경영난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자동차 가운데 전기차·하이브리드차·수소차의 비중은 11.8%로 전년보다 4%포인트 가까이 상승했다.
사실 주유소 업계는 코로나 사태 이전부터 수익률 악화에 시달려왔다. 전국 주유소 수는 2010년 1만3004개로 정점을 찍은 이후 해마다 줄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적정 주유소 개수를 8000개 정도로 본다. 현재 국내 주유소 시장이 포화상태라는 얘기다.
주유소 업계의 어려움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정부의 친환경차 확대 정책으로 내연기관 자동차 대신 전기차·수소차 등이 늘어 앞으로 20년 후 휘발유·경유를 파는 주유소가 지금보다 8000개 이상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주유소 사업은 이미 과당 경쟁에 따른 수익성 악화로 폐업이 속출해 10년간 연평균 1.3%씩 지속적인 감소세에 있다”며 “2040년엔 주유소 2980개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소차·전기차 충전, 물류 허브로 변신
수익률이 떨어진 주유소 업계는 물론 주유소 폐업으로 석유제품 판로가 축소될 위기에 처한 정유업계는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기존 주유소의 틀을 깨는 변신을 통한 생존 모색에 나선 것이다. 주유소에 전기차·수소차 충전 시설을 확충하고 패스트푸드점·편의점까지 입점시키고 있다. 단순한 주유·세차·정비 공간이 아니라 복합 생활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정유사들은 주유소들이 전국 주요 거점에 부지를 보유한 이점을 이용해 택배나 보관함 등 물류 기지로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SK에너지는 주유소를 거점으로 하는 택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GS칼텍스는 올 초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1’에서 주유소를 드론 배송의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쿠팡과 협업해 주유소 유휴 공간을 쿠팡 로켓배송의 물류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주유소에서 공유 전기자전거 대여·주차·반납·충전과 정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기존 주유 사업만으로는 한계에 부닥친 만큼 전국 네트워크를 가진 주유소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업 다각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