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급락했던 국제 유가가 이달 들어 배럴당 70달러에 육박하며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제유가(브렌트유 기준)는 4일(현지 시각) 주요 산유국들이 4월에도 감산을 유지하기로 합의하면서 4% 넘게 폭등한 데 이어 5일에는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의 고용 지표가 개선됐다는 소식에 3.9% 올랐다. 브렌트유는 5일 기준 배럴당 69.36달러로 2019년 5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시장에서는 앞다퉈 유가 상승에 베팅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국제유가가 올 3분기 배럴당 75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달 5일에는 올 상반기 75달러, 하반기에는 8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높여 잡았다. 배럴당 100달러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공급 과잉 해소와 글로벌 경기 부양책에 힘입어 국제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설 잠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JP모건의 크리스티안 말렉 석유·가스 부문 수석도 “향후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나 그 이상으로 치솟을 수 있다”고 했다. 국제유가가 100달러대에 거래된 건 2014년이 마지막이었다.
◇공급이 수요 못 따라가 유가 상승
최근 1~2주간 유가 급등은 미국 텍사스에 불어닥친 한파에 따른 미국의 산유량 감소와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산유국의 감산 유지 결정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단기적 요인 외에도 구조적으로 유가가 상승할 조건이 형성됐다고 분석한다.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갈 것이라는 전망이 유가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달 세계석유전망 보고서에서 올 하반기 석유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코로나 백신 보급이 확산되고 미국이 1조9000억달러(약 2130조원)를 투입하기로 하는 등 세계 각국이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단행하면서 석유 소비가 회복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OPEC은 올 4분기 세계 석유 소비량이 글로벌 경기 회복에 힘입어 1분기 대비 하루 평균 472만배럴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공급 능력은 떨어진 상태다. 글로벌 석유업계가 지난해 코로나발(發) 실적 악화와 전 세계적 친환경 바람 속에 석유 개발 투자와 생산을 줄였기 때문이다. 글로벌 에너지 컨설팅 업체인 우드매켄지에 따르면, 전 세계 에너지 업계의 지난해 유전 탐사·생산 투자는 1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럽 최대 석유 기업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강화를 위해 향후 10년간 석유·가스 생산을 40% 줄이겠다고 밝히는 등 주요 석유 업체들이 생산량 감축 계획을 내놓고 있다.
산유국이 감산 기조를 이어가면서 지난해 유가를 짓눌렀던 석유 재고도 상당 부분 해소된 상태다. 2월 기준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량은 지난해 7월 최고점 대비 10.4% 감소했다.
◇OPEC이 증산하면 안정 가능성
하지만 국제 유가가 100달러까지 치솟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당장은 중동 산유국들이 감산에 동참하고 있지만,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르면 다시 증산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14년에도 국제 유가는 여름에 배럴당 110달러까지 치솟았지만 연말에는 50달러대로 뚝 떨어졌다. 미국 셰일 업체들이 원유 생산량을 늘리자 위기감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가 셰일 업체들을 고사시키기 위해 대규모 증산에 나섰고 다른 산유국도 경쟁적으로 생산량을 늘렸다.
OPEC이 이달에는 감산 연장에 합의했지만, 다음 달 1일 열리는 회의에서 증산을 결정할 경우 유가 상승세는 한풀 꺾일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가는 OPEC의 공급량에 달려 있다”며 “앞으로 수년간 유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란의 원유 공급 재개, 생산업자들의 공급 증가 속도, 코로나 변이 등으로 상승세가 제한될 수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