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최악의 해를 보냈던 국내 정유 업계가 실적 개선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올해 코로나 백신 접종 확대로 휘발유·경유 등 석유 제품 수요가 늘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정유 업계의 수익에 직결되는 정제마진(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 비용을 뺀 것)과 국제 유가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해 글로벌 석유 업계에서 진행된 구조 조정도 우리 정유 업계 입장에서 긍정적 요소다. 해외 정제 시설 폐쇄로 글로벌 석유 제품 공급 여력이 줄어든 빈틈을 국내 정유 업계가 치고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년 한 해 역대 최대 규모인 총 5조979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한 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올 1분기 흑자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정제마진 올 초의 2배 수준으로
올 초까지만 해도 배럴당 1달러에서 맴돌던 정제마진은 2월 들어 2달러를 넘어섰다. 1월 첫째 주 평균 1.4달러에서 2월 넷째 주 2.8달러로 두 달 새 2배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일일 기준으로는 3달러를 넘는 날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정제마진이 반등한 것은 미국과 일본의 정유 시설 가동에 차질이 생기면서 글로벌 석유 제품 공급량이 떨어진 영향이 크다. 지난달 미국을 강타한 한파로 한때 텍사스주에서만 하루 전체 정제 용량의 40%가 넘는 260만배럴 규모의 정유 생산이 중단됐다. 일본에서도 지난달 13일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현지 최대 정유사 에네오스의 센다이 정제 설비 등 다수의 설비가 가동 중단됐다. 일본 전체 생산 능력의 30% 가까이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최근 정제마진 상승은 미·일 자연재해라는 단기적 요인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경기 회복으로 소비가 늘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측면도 있다”면서 “코로나 사태가 갑자기 악화하지 않는 이상 한번 올라간 정제마진이 다시 작년 수준으로 확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 유가 상승세도 정유 업계엔 큰 호재다.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가격은 올해 들어 이달 8일까지 배럴당 평균 58.63달러로 작년 4분기 평균보다 31.3% 올랐다. 유가가 오르면 저유가일 때 사들였던 원유 비축분의 가치가 상승해 정유사들은 재고평가이익을 볼 수 있다. 또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는 쌀 때 들여오고, 석유 제품은 비쌀 때 파는 ‘시차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됐다.
◇글로벌 석유업계 구조조정 반사이익
글로벌 석유 업계의 구조 조정도 국내 정유사들엔 이익이 됐다. 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전 세계 석유 업계는 구조 조정에 돌입했다. 글로벌 석유 업체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작년 말 호주 최대 정제 설비를 폐쇄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정유 시설이 잇달아 폐쇄됐다. 석유협회에 따르면,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미국·호주·일본·필리핀 이외에도 폐쇄됐거나 폐쇄를 추진하고 있는 정유 설비의 정제 능력은 하루 193만2885배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국내 정유 4사 하루 정제 능력의 60% 수준이다. 업계 관계자는 “다른 국가에서 석유 제품 공급이 줄어들면 제품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커지고, 우리 정유 업체들이 해외에 내다 팔 여지도 많아진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 업계는 작년 1분기에 실적이 워낙 안 좋았던 관계로, 올 1분기엔 기저효과도 누릴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호재까지 쌓여 실적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올 1분기 SK이노베이션은 영업이익 약 60억원, 에쓰오일은 1700억원을 기록할 것이라는 게 증권 업계의 예상이다.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은 작년 1분기 각각 1조7752억원과 1조7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그룹과 함께 실적을 발표하는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도 흑자 전환이 관측되고 있다.
다만 정유 업계에서는 실적 개선세가 장기적으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정유 업계 관계자는 “경영 여건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적 개선 흐름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으려면 경제 활동이 정상화해 석유 제품 소비가 이전 수준으로 살아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