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계의 대표적인 1세대 경영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조선일보 DB

“미국 유학을 구상하며 무역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중 한 사람인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국제 무대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분의 영어 통역을 맡아 주겠냐고 지인이 제안을 해왔다. 나는 원래 의대를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재수하면서 다니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수강은 뒷전으로 하고 당시 한국에서 개최되는 영어 관련 행사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모의 유엔 총회, 토론회, 영어 웅변대회에 매년 나가 여러 대회에서 1~2등 입상하며 장관상도 탔다. 또 군 복무 시절에는 주한미군군사고문단장의 통역 및 수행 부관을 하면서 의전도 담당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 회장의 통역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정웅(78) 메이그린스톤국제컨설팅 대표와 정주영(1915~2001년) 현대그룹 창업자의 인연은 47년전인 1974년에 이렇게 시작됐다. 박 대표는 유학 가기 전에 잠시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14년 동안 정 회장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그가 지켜본 정 회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박정웅 메이그린스톤국제컨설팅 대표
박정웅(78) 메이그린스톤국제컨설팅 대표

박 대표는 “정 회장은 창의적인 사고, 결단력, 실행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며 “특히 경영자들은 사업을 통해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장기 비전이 뚜렷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한국 재계를 주도하는 3~4세 경영자들이 변화된 사업 환경 속에서 선전하고 있지만, 정 회장만큼 국가를 생각하는 장기 비전과 사명감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오후 4시 서울 세종대로 코리아나호텔 1층 커피숍에서 시작됐다. 박 대표는 요즘 해외 기업들의 경영과 사업, M&A(인수-합병) 등에 관해 조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 78세의 나이에도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말투가 또박또박하고 힘이 있었다.

정주영과의 14년 인연

―전경련에서는 어떤 일을 주로 했나?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 부회장과 회장으로 있는 동안 그의 통역 및 연설문 작성, 의전을 주로 했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전경련 조사역이었다. 1976년 정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으면서 전경련 국제담당 과장, 부장, 상무로 초스피드 진급을 했다. 정 회장이 1987년에 전경련 회장을 그만 둔 뒤에는 1년 간 후임 전경련 회장인 구자경 LG 회장을 모시다가 ‘글로벌 소스 코리아’ 대표로 이직했다. 원래는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 회장을 만나면서 유학 길을 놓치고 내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시절인 1974년 한 모임에서 영어 통역을 담당하던 박정웅 비서와 함께 웃고 있다./박정웅

―정 회장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일을 했나?

“1974년 전경련에 처음 갔을 때 정 회장은 전경련 부회장으로 한영(韓英)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름만 걸쳐 놓은 비상근 위원장이 아니었다. 상임위원장처럼 매우 적극적으로 일했다. 영국 산업위원회와 함께 매년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합동회의를 했다. 이를 계기로 정 회장은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명사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 회장의 글로벌 감각

―정주영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서 외견상 국제 교류와는 거리가 멀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다. 정 회장은 국제협력위원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글로벌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이 위원회를 활용해 영국에 가서 영국의 거물 경제인들 뿐만 아니라 장관도 만나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만났다. 영국 포드의 최고 기술자였던 조지 턴볼을 현대자동차 임원으로 영입하고 외국의 조선 기술자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국제협력위원회의 활동이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유럽에 가면 한국의 다른 기업인은 몰라도 현대 정주영 회장은 유명한 인사였다.”

―정 회장은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나?

“나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지만 메모를 열심히 하는 습관이 있다. 메모를 들추어 보면 정 회장은 외국 출장을 매우 많이 다녔다. 1년에 최소한 3~4번은 해외로 나갔다. 미국이 ‘수퍼 301조’를 내세워 한국 제품의 미국 수출을 규제할 때에는 현대그룹 일을 제껴두고 미국에 2~3주 동안 묵으면서 한-미 통상 환경 개선을 위해 일을 했다. 당시 정부측 대표는 금진호 상공부 장관이었고 민간 측 교체 단장은 남덕우 무역협회 회장과 정주영 전경련 회장이었다. 정 회장이 민간 대표로 나가서 기자회견, 인터뷰, 공공연설 등을 할 때 내가 통역을 했다. 유럽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도 정 회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를 원했다. 국가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미국이 '수퍼 301조' 규정을 들이대며 한국 제품의 미국 수출을 제한할 때 회사 일을 제껴두고 미국에 2~3주씩 머물며 통상 환경 개선을 위해 민간외교 활동을 했다. 사진은 수출용 자동차들이 선적을 위해 항구에 기다리는 모습./조선일보 DB

―해외에서의 정 회장 일정은 어땠나? 바쁘게 돌아다녔나?

“각국 요인 면담, 산업 현장 시찰, 기자 회견, 인터뷰, 연설 등이 빡빡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썼다. 정 회장을 모시고 출장 다닐 때 나는 거의 잠을 못 잤다. 낮에는 수행하고 저녁에는 다음날 일정을 잡아야 했다. 연설문도 써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힘든 일을 어떻게 견뎠나 싶다.”

―정 회장은 회사 임직원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따사로운 면도 있다. 미국 출장을 갔다 올 때는 주로 하와이를 경유했는데 정 회장이 ‘많이 고생했지. 자네, 하와이에서 쉬었다 와’ 이렇게 배려해 주곤 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①

: 뛰어난 창의력

인터뷰 주제인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 기업가 정신, 국가관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다면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생생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정 회장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세가지이다. 첫째, 창의력이다. 우리나라의 중동 진출,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독자 개발, 조선사업, 88 서울올림픽 유치 등 정 회장이 한 일은 모두 당시에 상식적으로 가능했던 일이 하나도 없다. 올림픽에 앞서 한강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강 북쪽의 강북도로와 남쪽의 88도로 건설도 정주영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들었다. 한강 준설 작업을 하면 한강 바닥도 깊어져 홍수 때 범람을 막을 수 있고, 준설 과정에서 나온 모래를 도로 공사에 쓸 수 있으며, 남은 모래는 팔아 도로 공사비로 충당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들었다.

정 회장은 창의력과 상상력의 무한한 힘을 신봉하고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내가 연설문을 쓸 때, 연설문에 ‘인간 창의력과 상상력의 무한한 힘’이라는 표현을 쓰면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연설문 작성 때 수시로 이 표현을 넣었다.”

88서울올림픽을 맞아 진행된 한강 정비 사업과 강변 남북도로 건설 사업은 정주영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한강변 북로와 노들섬./조선일보 DB

―정 회장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나?

“타고 난 측면이 있다. 다만 그는 신문 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자신은 바빠서 연구할 시간이 없지만 신문사 기자들은 매일 연구해서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매일 매일 쏟아지는 뉴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만 골라서 정리해 놓은 것이 신문 사설이니, 사설 만큼 좋은 정보가 어디에 있겠냐고 했다. 정 회장은 신문 사설을 매일 읽고, 시간이 없을 때에는 신문에서 오려 낸 뒤 차안에서 이동할 때 읽곤 했다. 또 경제인보다 경제학자, 경영학자, 미래학자를 만나서 세계의 장기 비전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②

: “이봐, 해봤어?”

―정 회장의 둘째 장점은?

“‘이봐, 해봤어' 정신이다. 정 회장은 자신이 판단하기에 타당성이 있고 해야 할 일이라면 중간 관리자들의 결정을 생략하고 자기가 직접 결정해 밀어부쳤다. 중간 관리자들은 원래 힘든 일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중간 관리자들이 도전적 과제를 놓고 부정적 자세를 보이면 정 회장이 밀어 부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이 사장’ ‘박 상무’ 이렇게 직함을 붙여 부르다가, 맘에 안들고 화가 나면 성과 직함을 모두 생략한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상대의 아래 위를 오르락 내리락 훑어 보면서 대뜸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봐, 해봤어?’ 정 회장이 눈을 부라리며 아래위를 훑어보면 화가 났다는 뜻이다.”

― ‘이봐, 해봤어’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를 든다면?

“현대중공업 초창기에 배를 만들어 그리스와 중동의 선주에게 건네줬다. 선주들이 한국에 와서 계약할 때 한국측 최종 서명자는 정주영 회장이었다. 그런데 선주들은 협상 과정에서는 전혀 이야기가 없다가 막상 정 회장을 만나 최종 사인할 단계에 이르면 본사에서 인도 기간을 3개월 앞당기라고 했다며 인도 기간 단축을 조건으로 내걸곤 했다. 실제로 배가 1년 뒤에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인도 기간을 당겨 놓을 경우 마감 시간에 못맞추면 지체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어 배 값을 깎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회장은 아래 사람들과 상의도 없이 사인을 해주는 사례가 있었다.”

해외 선주들은 현대중공업 창립 초기에 건조된 선박의 인도 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해 달라고 요구했고 정주영 회장은 이를 들어주는 사례가 있었다. 실무자들이 반대하자 '이봐, 해봤어?'라고 면박을 주며 공기 단축을 지시했다. 사진은 울산 동구에 있는 현대중공업 해양공장./조선일보 DB

―그러면 배를 제 때에 인도할 수 없지 않나?

“정 회장이 인도기간을 단축한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 임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난리가 난다. 도저히 그 기한에 배를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 때마다 정 회장은 ‘이봐, 해 봤어?’라며 면박을 줬다. 정 회장은 당시 남들이 1년 걸린 것을 9개월로 3개월 단축해야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의 조선 능력이 개발되어 국제경쟁력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긍정적 역발상

―다른 사례는?

“1970년대 중동 건설을 들 수 있다. 당시 정 회장은 건설 공사의 응찰 가격을 다른 나라 경쟁사보다 낮게 잡아 수주했다. 그러자 국내외의 다른 건설사들은 정 회장의 저가 수주 때문에 자신들이 적정한 가격에 중동 건설 공사를 수주하기 어려워졌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비용 절감에 대한 복안이 있었다. 그는 당시 부족한 건설 기술은 외국 자문단에게서 배우면 되고, 건설 장비도 외국 장비를 빌려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제일 핵심은 공사기간 단축이었다. 공기를 단축하면 인건비와 장비 임대료를 줄일 수 있다. 또 수금을 앞당길 수 있다. 그래서 저가 수주를 하더라도 공기 단축으로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 회장은 과감하게 공기 단축 카드를 실행하면서 중동 진출 초기 3년 동안 9억 달러를 벌어 한국에 송금했다. 당시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이 2000만~3000만달러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큰 금액인가? 서울 외환 시장이 난리가 났었다.”

현대건설이 1976년 수주해 시공 중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 이곳을 찾은 정주영(오른쪽에서 둘째) 현대그룹 회장이 임직원·근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시 이 공사는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렸고 수주액(9억3000만달러)은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의 규모였다./조선일보 DB

―정 회장은 왜 중동으로 갔나? 동생들도 반대했다고 하던데.

“1970년대 초반에는 오일 쇼크로 세계의 돈이 중동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정 회장은 돈 벌려면 돈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또 중동 건설 현장의 어려움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달리 중동은 건설공사를 하기 좋은 곳이라고 봤다. 사막이라서 모래와 자갈이 사방에 널려 있고, 물이 부족하지만 바닷물을 정수해서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낮에 더워서 공사를 할 수 없으면 인부들은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대신 밤에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 회장이 역발상의 대가인 것처럼 들린다.

“부정적인 생각에 좌우되면 있는 길도 안보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없던 길도 보인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이런 파격적인 발상을 과감하게 밀어부치는 실천력이 있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갔다.”

피터 드러커가 사과한 이유

―정 회장의 실천력에 대해 당시 해외의 평가는 어떠했나?

“1980년대에 미국의 유명한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가 한국에 와 전경련 회장이던 정 회장과 만났다. 내가 통역을 했다. 드러커는 정 회장을 만나자마자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사과를 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드러커가 말을 이어갔다. ‘모든 경영자들이 나를 경영의 구루(스승)라고 한다. 내가 가르친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 창의력과 혁신정신인데, 창의력과 혁신정신 부문에서 당신보다 더 극적인 산 증인이 어디에 있나? 그런데도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 당신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사과한다’고 했다.”

현대 경영학계의 대가인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조선일보 DB

―드러커가 정 회장을 기업가 정신의 산 증인라고 본 이유는?

“기업가 정신은 불확실성이라는 안개 너머에 존재하는 사업 기회를 간파한 뒤 과감하게 도전하고 거기에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동원하는 리더십과 결행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 회장은 조선과 자동차 분야에서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해 큰 업적을 이뤘다고 드러커는 평가했다. 앞으로는 정 회장의 DNA(유전자)를 비롯해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포드, 카네기, 록펠러, 웰치 등 미국의 역사적인 경영자들 성공 배경에는 모두 미국이라는 엄청난 시장 기반과 자원이 있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아무런 지지 기반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드러커가 높이 평가했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③

: 사업보다 국가가 우선

―정 회장의 세번째 장점은?

“자신의 사업보다도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애국지사적인 기업인이라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 그런가?

“내가 정주영 회장을 존경하게 된 계기는 현대건설의 주식 공개와 관련이 있다. 현대건설은 중동 건설 붐이 한참 지난 뒤에 주식 공개를 했다. 중동 건설 당시에 주식 공개를 했다면 더 큰 돈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주식 공개를 늦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식 투자는 돈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현대건설을 만들고 성공시킨 사람들은 열사에서 고생을 하며 중동에서 일한 노동자들인데, 왜 그 열매를 다 돈 가진 사람에게 주느냐.’ 주가가 한창 뜰 때 주식을 공개할 경우 돈 있는 주식투자자들이 사서 큰 이익을 가로채 갈까봐 경계한 것이다.

정 회장은 대신 주식을 공개해서 얻는 수익의 50%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며 아산재단을 만들었다. 아산재단은 서울 뿐 아니라 채산성이 전혀 없는 단양, 강릉 등 전국 지방 6곳의 오지에 병원을 지었다. 그래서 그 곳의 노동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고, 지역 병원에서 못 고치면 시설이 나은 서울로 데려와 병을 고치게 했다. 정 회장은 인간의 4대 비극을 틈만 나면 이야기했다.”

정주영 회장이 자신의 주식을 출연해 근로자와 서민들을 위해 세운 서울아산병원./뉴시스

―인간의 4대 비극이라니?

“첫째, 배고파 굶어 죽는 것, 둘째,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것, 셋째, 자식이 똑똑해도 못가르쳐 빈곤을 대물림하는 것, 넷째, 약값 몇푼이 없어서 나을 병도 못고치고 죽는 것이다. 이런 비극들을 우리 기업이 앞장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국민들이 모두 더불어 잘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에게 각별했던 애정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는 노사 분규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데, 노동자들에 대한 정 회장의 애정이 각별했다니 색다르게 들린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봄’이 찾아 오면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현대중공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중공업 울산 본사에서 노사 분규가 터졌을 때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정주영 나와라’고 했다. 정 회장은 회의장에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다가 직접 밖으로 나가 시위중인 노동자들과 대면했다. 그러나 미리 그런 상황에 대비한 마이크 시스템도 없었다. 농성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정 회장은 수천명의 노조원들에게 둘러싸여 몇시간 동안 감금당했다가 겨우 풀려나왔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는 노사분규가 잦기로 유명하다. 사진은 지난 8일 시위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노조./연합뉴스

―정 회장은 당시에 어떤 심정이었다고 하던가?

“‘어느 순간 나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머리띠를 둘러매고 ‘정주영 나와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정주영이지 않나? 내가 나오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 관뒀다’고 했다.

우리는 정 회장이 그날 감금에서 풀려나 서울에 돌아온 뒤에 며칠 동안 요양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 바로 전경련 명예회장 자격으로 전경련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첫마디는 전경련이 중심이 되어서 노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첫째로 지켜야 할 기조는 사실에 근거해서 정직하고 떳떳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비난은 없었다.

노사 대책 회의가 끝나고 나서 저녁을 내겠다며 서울 관철동의 한 술집에 갔는데 밴드 보고 더 빠른 박자의 춤곡을 연주하라고 연신 재촉했다. 몇 천명의 군중에게 장시간 시달리고 나온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과 체력이 강한 철인(鐵人)이었다.”

철인(鐵人) 체력

정 회장의 체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그의 건강에 대해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정 회장은 자신의 체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나?

“그렇다. 그는 평생 동안 차에서 타거나 내릴 때 직접 차문을 열고 닫았다. 남의 부축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정 회장이 별세하기 전해인 2000년 건강이 나빠지자 ‘왕자의 난’(2세들의 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다. 그 때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차에서 내리는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부축하려는데 정 회장이 화를 내며 팔을 뿌리치는 장면이 언론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다. 당시에는 정 회장이 아들 몽구 회장을 싫어해서 그랬다는 세간의 해석이 있었지만, 사실은 정 회장이 몽구 회장을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부축 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내 몸이 건강한데 왜 남의 도움을 받느냐는 신조를 평생 갖고 있었다.”

-건강 관리를 어떻게 했나? 평소에 운동을 했나?

“건강 관리를 위해 별도로 운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평생 동안 새벽에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새벽에 자식들과 걸어서 출근하는 정주영 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조선일보 DB

깜짝 놀란 전두환 대통령

다시 정 회장의 애국심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갔다.

―정 회장이 1983년에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주도한 것도 국가에 대한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나?

“그렇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5공 정권은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정 회장이 대신 망신을 당하도록 유치 운동에 나서도록 했다. 유치가 가능하리라는 것은 정 회장 말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 올림픽 유치의 공식적인 주최인 서울시장은 육군 헌병감을 지낸 박영수씨였는데. 그는 독일 바덴바덴의 올림픽 유치 홍보관 개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정 회장만이 유치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어떻게 유치가 가능하다고 믿었나?

“정 회장은 1980년 소련 모스크바 올림픽이 미국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된데 이어, 1984년 미국 LA 올림픽이 소련의 불참 선언으로 또 다시 반쪽이 된 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이 분단국인데, 두개의 올림픽이 이미 반쪽난 상황에서 미국과 소련이 분단국의 올림픽에 참여하면 세계 평화와 화합의 현장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 미-소가 참여하기 때문에 북한도 서울올림픽에서 테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현대와 인연이 있는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일대일로 협상을 벌였다.”

―유치에 성공한 뒤에 어떻게 됐나?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놀랐는데, 특히 전두환 대통령이 놀랐다. 전 대통령은 이후 경제부처 장관을 임명할 때 정 회장의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1년 3월 3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참석 인사들의 박수에 답례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정 회장이 관계 인사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들면?

“국무총리를 지낸 유창순 전경련 회장(1989~1993년 재임)이 한 말이 있다. ‘군 출신 인맥이라고는 소위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국무총리가 됐는지 알아봤더니 정주영 회장이 천거했다’고 말했다.”

정부에 거침 없이 쓴소리

―혹자들은 그런 관계를 ‘정경유착’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정 회장이 정부에 쓴소리를 한 사례도 있나?

“많이 있다. 정 회장은 정부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정 회장은 상공부 등에서 강연도 많이 했는데, 한번은 강연 중에 한 공무원이 정 회장이 한 공사 가운데 부실공사도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화가 난 정 회장은 ‘그건 우리 실무자들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당신들이 상납을 받아 중간에서 돈을 떼어먹었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다른 에피소드는?

“전두환 정부가 1980년대 초에 중장비를 제작하던 현대양행을 부실기업으로 지정해 한국중공업에 넘겨준 적이 있다. 그러자 정 회장은 경총 간담회에서 ‘민간이 창업한 기업을 정부가 언제부터 마음대로 통폐합 했느냐? 우리 정부가 사회주의 정부가 됐다’고 비판했다. 당시 5공 정권의 서슬 퍼런 분위기에서는 가히 폭탄 발언이었다. 사회자가 ‘정 회장이 흥분해 말 실수를 했다’며 참석자들에게 대외비로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산중공업은 1962년 현대그룹의 현대양행으로 출발해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을 거쳐 2000년 두산그룹에 인수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뉴시스

―전두환 대통령의 반응은?

“전 대통령은 이후에 현대양행을 한국중공업에 넘겨준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현대양행을 정 회장에게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이었다. 그래서 전 대통령이 노태우 당선자에게 찾아 갔었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참모진과 상의해보겠다’고 하면서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 대화 통로를 막다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던 10년 동안 정부와 전경련 혹은 재계의 관계가 상당히 좋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전임 박근혜 정부의 일을 문제 삼아 전경련을 사실상 해체한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역협회-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는 법정 단체이므로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고 회비를 내야 한다. 이에 반해 전경련과 경총은 자율 단체이다. 정부가 인사권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좋아하지 않는 정책도 건의할 수 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국가를 위해 쓰겠다고 해서 대기업 총수들이 미르 재단에 돈을 냈다. 국가 최고 통치권자의 권유를 기업인들이 어떻게 거절할 수 있나? 이걸 문제 삼아 국회의원들이 총수들에게 전경련을 탈퇴하도록 국회 청문회에서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이게 말이 되나?”

재계는 문재인 대통령 출범 이후 정부와 기업의 소통 창구가 막혔다고 평가한다. 사진은 12일 충남 아산 경찰대학에서 연설하는 문 대통령./연합뉴스

―전경련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나?

“우선 민간 경제계의 목소리를 정부에 반영할 언로가 막혔다. 또 전경련이 60년에 걸쳐서 착실히 다져온 미국-유럽-일본 등 해외 경제단체와의 인맥을 나라를 위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국가적인 손실이다. 전경련은 해외 23개 민간 협력 단체와 교류를 오랫동안 쌓아왔다. 정부가 나서면 안되는 것도 민간이 나서면 성사되는 일이 많이 있다. 남북관계도 그렇다.”

정 회장의 민간 외교 활동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10년 동안 재임할 당시에 국가를 위해 봉사한 사례를 든다면?

“친북 성향이 강했던 나이지리아를 정부의 요청으로 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든 적이 있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김경원 청와대 안보수석이 전경련에 와서 ‘나이지리아가 석유자원과 영향력이 있어 인근 아프리카 외교에 중요한데, 친북한 국가가 되면 곤란하다’고 해 정 회장이 직접 나가서 한국 외교 관계를 복원시켰다. 비동맹 그룹의 수장인 인도와 친북 성향이 강했던 호주도 정 회장이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며 한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다른 사례는?

“1977년은 한-미 관계가 최악이었다. 미국에서 박동선 로비 사건이 터지고,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있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우리 나라가 안보가 불안하다. 중공업이나 자동차 등은 발주 후 인도까지 1년 이상 걸리는 것들인데, 한국에 안보 위협이 있으면 한국에 조선이나 자동차를 주문하거나 투자할 외국 기업이 있겠나? 우리 경제인들이 한국 안보에 앞장 서야 한다. 정부는 나서기가 어렵다. 한-미-일 동북아 안보 포럼을 만들어서 세계적인 학자들을 서울에 불러 주한 미군 철수 주장이 왜 부당하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지 세계에 알리자’고 했다.

그래서 우파 뿐 아니라 좌파 성향의 학자들까지 불러서 서울에서 동북아 안보포럼을 개최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인 베시 대장, 싱글러브 참모장(소장)도 참석했다. 싱글러브 참모장이 공개적으로 카터 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가 해임되고 미국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가 해임, 전역조치됐던 싱글러브 전 주한미군 참모장./조선일보 DB

북한의 여론전에 맞불

―포럼이 효과가 있었나?

“이듬해인 1978년쯤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안기부 김영광 판단기획국장이 전경련을 찾아왔다. 북한이 일본 도쿄에서 대대적으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여 왜 한국에서 미군이 철군해야 한반도에 평화가 오는지 전세계에 홍보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갖고 왔다. 안기부가 이 정보를 늦게 파악해 박정희 대통령이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정부는 대안으로 한국이 북한보다 먼저 도쿄에서 같은 성격의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김 국장이 김준엽 고려대 아시아연구소장에게 가져갔더니, 김 소장은 시간이 급하고 조직력과 돈도 없어서 짧은 시간내에 세계적인 학자를 초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다급해진 김 국장이 여러 곳을 수소문하다가 전경련이 이미 그런 성격의 세미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을 찾아와 그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정 회장이 이를 수락하고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6개월도 안남아 시간이 촉박해서 이를 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 회장의 지시에 그런 논리가 통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 회장이 사비를 쓰면서 독려해 결국 북한 행사 한달 전에 도쿄 제국호텔에서 그 행사를 했다. 그리고 북한의 계획을 무산시키는데 성공했다. 민간 단체는 이처럼 정부가 공개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재계 3~4세들이 배워야 할 점

정주영 회장 같은 창업 세대가 일구어 놓은 한국 재계를 지금은 3~4세 경영자들이 끌고 가고 있다. 창업자 세대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창업자들에 비추어 봤을 때 재계 3~4세들이 경영을 잘 하고 있나?

“2-3-4세가 삼성이나 현대차, 현대중공업, LG, SK 등을 경영하고 있는데, 국내에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있는데다 능력 위주의 전문가 등용을 주요 경영 전략으로 삼고 있어서 대체로 잘 하고 있다고 본다.”

한국 재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재벌가 3~4세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조선일보 DB

―3~4세 경영자들에게 부족한 점은?

“소비재와 중공업에 주력했던 창업자 세대와 달리 지금 경영자들은 컴퓨터와 5G(세대) 통신,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첨단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을 하고 있다. 다만 기업 경영의 대상이 되는 주력 산업이 컴퓨터, 반도체, 인공지능, 생명공학 등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첨단 기술들은 경영자의 창의력과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을 구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경영자들이 기술 경쟁에 쫒겨 너무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경제에 대한 장기적인 발전 비전을 가져야 한다.”

―3~4세 경영자들이 창업자 세대에게서 배울 점을 3가지 꼽는다면?

“첫째, 국가 발전을 위한 장기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 기여 정신을 가져야 한다. 빌 게이츠는 기업가가 죽기 전에 축적한 부를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지 않으면 범죄(crime)라고 했다. 셋째, 컴퓨터, 5G,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의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고 있지만 이러한 기술을 다룰 때 목적과 수단을 가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3~4류 수준 못 벗어난 현 정부

―기업을 경영할 때는 정부의 정책도 큰 변수이다. 현재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예전 정 회장 시절과 비교할 때 어떤가?

“예전에는 기업과 정부간에 대화 창구가 열려 있었다. 기업인들이 언제나 정부 각료와 실무자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대화 통로가 대부분 막혀 있는 느낌이다. 민간기업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는 통로가 없다. 그래서 요즘 기업인들은 정말 기업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기업인들이 국가에 기여할 의견을 내기도 쉽지 않고, 기여할 기회도 갖지 못한다. 요즘 기업인들은 자칫 정부에 잘못 보였다가 제재 받을까 두려워 한다. 이렇게 옥죄서야 어떻게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겠나?”

―현 정부가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인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우리나라 기업은 2류이고, 정치는 3류나 4류라고 했다가 김 대통령에게 혼 난 적이 있다. 나는 요즘 정부가 그 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한국 정부 조직이 3류나 4류라고 비판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삼성

‘거인’의 단점

스마트폰을 꺼내 시계를 들여다 봤다. 인터뷰를 시작한지 벌써 2시간 40분이 넘었는데도 박 대표의 말은 끊임이 없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시간이다. 정 회장의 장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마지막으로 정 회장의 어려웠던 시기와 단점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정주영 회장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다. 김 대통령은 1992년 대선때 국민당 대선 후보로 나와 자신과 경쟁했던 정 회장이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 내내 현대그룹을 억압했다. 김영삼 정부 동안 현대그룹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작지 않은 해외 공사를 수주했는데도 국책은행에서 당연히 해줘야 할 지급보증을 해주지 않았다. 그 때가 정 회장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정 회장은 김 대통령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멸치 어장을 가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갑근세(근로소득세) 한 번 내 본 적이 없는 건달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대선 출마 실패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나?

“정 회장은 당시에 ‘나와 대통령 당선자(김영삼)를 비교해서 나를 실패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대통령이 안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나라 최초로 IMF 외환 위기를 초래하고 국민들과 기업을 고통에 몰아 넣은 김영삼이 성공한 것이냐? 나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출마를 했으니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별세하기 3년전인 1998년 소떼를 이끌고 방북에 나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현대그룹

―정 회장은 86세에 별세했다. 본인은 몇살까지 현대그룹을 경영할 생각이었나?

“90세까지만 경영하고 은퇴하겠다고 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사장들’ 인사만은 본인이 직접 하고 싶다고 했다.”

―사장 인사를 직접 한다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나에게 여러차례 그렇게 말했다.”(웃음)

―정 회장의 단점은?

“성격이 급하고 남들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특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니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거인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동시에 그런 성격 때문에 김영삼 정부 시기에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몸이 많이 상했다. 건강에 자신이 넘치던 정 회장이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뜬 것은 그런 성격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참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는 성격, 이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박정웅 메이그린스톤국제컨설팅 대표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기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