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선 기계 - 충북 진천에 있는 건축 단열재용 플라스틱 공장에서 이 회사 대표가 멈춰 선 기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이 업체는 요즘 성수기인데도 인력이 부족해 기계 절반을 놀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인력 공백을 메울 외국인 근로자마저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진천=신현종 기자

지난해 음식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한 김모씨는 최근 인터넷에 직원 2명 모집 공고를 냈다가 철회했다. 시식 제품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 직원 수는 김씨를 포함해 4명. 시범 서비스에 이어 본격적인 사업 시작을 위해 재무와 온라인 마케팅 전문 인력을 1명씩 뽑으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7월부터 주 52시간제 적용 대상이 된다. 김씨는 “우리처럼 완전 초창기 벤처는 서비스 론칭(출시)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일한다”며 “직원 2명을 더 뽑으면, 이렇게 일을 할 수 없다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명에서 직원 수 20명의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최모(62) 대표는 지난해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10억원 남짓 영업 적자를 냈다. 하지만 최씨는 올해가 더 걱정이다. 7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 5년 넘게 일했던 숙련공 4명이 사표를 냈다. 특근·야근이 없어져 월 300만원 정도 되던 수입이 200만원 초반으로 내려갈 상황이 되자, 배달 일을 하겠다며 떠난 것이다. 최 대표는 “퇴직금 줄 돈이 없어 최근 아내·아들 앞으로 들었던 생명보험 2개를 깼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근로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주겠다며 2018년 7월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을 시작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했다. 자금·인력 사정이 나은 대기업들은 이 제도에 적응해 근무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5~49인의 벤처나 영세 제조업체에는 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벤처는 일정 시기 집중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인력난·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 제조업체엔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사업 현장의 특수성을 외면하는 일률적인 주 52시간제가 우리 산업의 기초를 뒤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벤처 싹 자르는 주 52시간제

직원 수 20명의 세무 서비스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7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다. 회사에는 직원들의 근태를 관리하는 시스템조차 없다. 직원들이 맡은 업무를 끝낼 때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정해 일을 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주 52시간을 넘겨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데, 법으로 못 하게 한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혹시 다른 회사에서 신고를 하지 않을까 불안하다”고 했다.

소규모 스타트업들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벤처 창업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주 52시간제에 대한 대비 자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이를 지키다 보면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을 해서 성과를 내는 벤처의 성공 방정식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코리아스타트업 포럼 정미나 정책실장은 “규모가 작은 곳일수록 주 52시간제 근무제를 당장 시행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실현 불가능한 52시간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은 가뜩이나 심각한 중소 제조업계의 인력난을 심화시키고 있다. 야근·특근 등이 불가능해지면서 임금이 줄자 숙련공들도 떠나가기 시작해서다. 젊은 구직자들은 갈수록 일이 상대적으로 편한 서비스업을 선호하는 데다, 비수도권 업체일수록 구직자의 기피 현상은 심해진다.

그동안은 외국인 근로자로 인력 공백을 메웠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이마저도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법무부에 따르면 2018년 4월 국내에 들어온 단순 기능 인력 외국인은 53만6000명이었지만, 올해엔 38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치솟는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허덕이는 업체도 적지 않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서병문 이사장은 “인건비 상승으로 올해 영업이익 자체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곳이 태반이다. 갈수록 영세 제조업체는 설 곳이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연구원은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해당 업체들이 감당해야 하는 추가 인건비를 3조원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30인 미만 기업은 내년 12월 31일까지 노사 합의를 거쳐 특별연장근로를 1주에 8시간까지 할 수 있도록 보완책을 내놨지만, 뿌리산업 제조업체나 스타트업 운영자들에겐 그조차도 현실적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1주일 8시간이면 하루 2시간도 채 안 된다”며 “생색내기에 그치는 보완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