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15일(현지 시각) 북해산 브렌트유는 전일보다 1.6% 오른 배럴당 73.99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2018년 10월 31일 배럴당 75.47달러를 기록한 이래 32개월 만에 최고치다.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도 전일보다 1.74% 오른 72.12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역시 32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가 주로 도입하는 두바이유도 14일 배럴당 72.01달러로, 2019년 5월 이후 2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가 상승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다. 백신 보급과 미국·유럽의 경기 회복에 따라 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주춤했던 원유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문제는 상승세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가파르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은 올해 초 유가 75달러 진입 시기를 3분기 이후로 예상했다. 하지만 상반기가 끝나기 전에 브렌트유가 75달러에 근접한 것이다. 글로벌 원유 업계에서는 유가가 수개월 내 100달러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탄소 중립' 정책이 밀어올린 유가
에너지 전문가들은 최근의 유가 상승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단순히 수요·공급 차원을 넘어, 미국·유럽이 주도하는 ‘탄소 중립’ 정책도 유가 상승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4일 “최근 70달러대에 안착한 국제 유가가 앞으로도 계속 오를 가능성이 있다”며 “에너지 분야 자금이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에 집중되면서 화석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급감한 것이 유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전했다. 석유 시설에 대한 투자가 줄어 당장 석유 공급을 늘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석유 업체들의 석유 채굴 투자액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컨설팅 업체인 우드매켄지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석유 채굴 투자액은 3290억달러(약 368조원)로, 지난 2014년 8070억달러(약 902조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우드매켄지는 올해부터 전 세계 석유 채굴 투자액이 조금씩 늘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석유 업체들이 석유 관련 투자를 늘리지 못하는 것은 투자자들의 친환경 사업 전환 압박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헤지펀드 엔진넘버원은 세계 최대 석유 기업인 엑슨모빌이 친환경 에너지 투자에 집중하도록 경영 방향을 전면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미국 셰일 업체들이 줄줄이 파산하거나 재정난에 내몰린 것도 유가 상승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코로나 여파로 유가가 지난해 한때 마이너스로까지 곤두박질치면서 미국 석유 채굴 굴착기 수는 2018년 말 대비 약 60% 이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유가 100달러 시대 오나
이런 가운데 국제 유가가 1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15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비톨,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골드만삭스 등 원자재 트레이딩 업체들은 석유 공급이 감소하는 반면 전 세계 석유 수요는 재생에너지 등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기에 앞서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100달러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코로나 백신 보급에 따라 석유 수요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미국 뉴욕주는 코로나 백신을 최소 1차례 접종받은 성인이 70%를 넘어서자 모든 코로나 규제를 즉각 없애기로 했다. 이동 제한이 풀리면 석유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미국 원유 재고가 감소할 것이란 전망이 계속 나오고 있다. 미국 석유 협회(API)는 11일 기준, 미국 원유 재고가 전주 대비 850만배럴 감소했다고 밝혔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 국내 산업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박사는 “국제 유가 상승은 기업의 생산 비용을 증가시키고 가계 소비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