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운임 담합’을 이유로 국내외 해운사에 과징금 8000억원을 부과하겠다고 나서자, 부산항발전협의회·인천항발전협의회·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한국해기사협회·한국해운협회 등 국내 주요 해운 단체들이 8일 일제히 1인 시위를 벌이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는 해운사들이 동남아 노선에서 불법적인 공동행위(운임 담합)를 했다는 입장이지만, 해운 업계는 “해운사들이 공동으로 운임을 정하는 것을 합법으로 규정한 국내외 해운법을 무시한 처사”라며 과징금 부과 방침을 철회하라고 맞서고 있다. 해양수산부도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인 데다 해외 선사들까지 반발할 경우 국제 통상 이슈로 비화할 수도 있다.
◇공정위, 국내 선사 11곳에 과징금 5600억원 부과 방침
공정위 조사는 2018년 목재합판유통협회가 ‘국내외 선사의 동남아 항로 운임 담합이 의심된다’고 신고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신고 당사자인 협회 측은 이듬해 8월 신고를 취소했다. “선사들과 운임 조건에 대해 충분히 입장을 검토해 새로 합의하기로 했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계속 조사를 진행하다 지난 5월 이번 사안을 전원회의에 상정하고, 국내 선사 11곳과 해외 선사 11곳에 8000억원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심사보고서를 보냈다. 2003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동남아 노선의 운임을 불법 담합했다는 이유였다. 과징금은 이 기간 발생한 매출액의 8.5~10%에 이르는 거액으로, 국내 선사들에 대한 과징금만 5600억원에 달한다. 과징금은 국내 업체별로 최소 31억원에서 최대 2300억원으로 추산된다.
해운 업체들은 과징금 부과 방침에 반발하고 있다. 가격 담합은 일반적으로 시장을 교란하는 해악이지만, 해운업은 세계적으로 담합을 인정하는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봉기 해운협회 상무는 “글로벌 대형 선사들이 가격 경쟁으로 중소 선사를 도산시킨 뒤 운임을 대폭 올리는 방식으로 화주와 소비자들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늘어나자 1974년 유엔(UN) 정기선 헌장을 통해 해운 업계의 담합을 인정했다”면서 “한국도 1978년 해운법을 개정해 해운사의 담합을 인정했고 지금까지 40여 년간 이 방식대로 운항해왔다”고 말했다.
다른 해운 업계 관계자는 “독과점을 가장 강력하게 금지하는 미국에서조차 해운업의 공동행위를 인정한다”면서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해운업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한 중형 해운사 관계자는 “10여 년간 장기 불황을 겪은 중소 해운사들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어떻게 내겠느냐”면서 “과징금 내려면 배를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공동행위 요건 미준수” VS 해수부 “문제없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운사들은 해운법이 요구하는 공동행위 관련 요건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운사들이 ‘부속 협의’ 120여 건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법이라는 것이다. 반면 해운 업계는 부속 협의 신고 여부를 두고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와 19차례에 걸쳐 운임 관련 기본 협의 신고를 했고 화주 단체와 사전 협의도 거쳤기 때문에 절차상 하자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수부 관계자도 “기본 협의로 정한 운임 범위 내에서 가격을 수시로 조정하는 부속 협의는 신고할 필요가 없고, 수시로 가격이 변하기 때문에 일일이 신고할 수도 없다”면서 “선사들의 운임을 공개하도록 하는 운임공표제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부속 협의를 신고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국제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대상에 중국·일본·싱가포르·대만 등 7개 국가 선사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김영무 한국해운협회 상근부회장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해운사 공동행위가 문제된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과징금을 부과받는다면 이 국가들이 가만히 있겠느냐”면서 “한국 해운 업체에 대한 보복 조치가 곧바로 들어올 것이고, 동남아 화주들은 공정위 결정을 근거로 국내 해운사를 대상으로 한 집단소송에 나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