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각) 낙태 찬성론자들이 뉴욕에서 미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가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낙태 금지법’을 시행하면서 미국이 들썩이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9일(현지시각) “(텍사스의) 이 법은 명백히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은 낙태 금지 시기를 현행 20주에서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는 6주로 앞당긴 것이다. 통상 임신 6주는 여성이 임신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는 기간이다. 사실상 낙태를 금지한 셈이다. 이 법은 강간이나 근친상간 등 범죄에 따른 희생자에게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치권 뿐만 아니라 리즈 위더스푼 등 미 할리우드 스타들도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을 강력 비판하고 있다.

일부 테크 기업들도 텍사스주의 이 법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바로 데이팅앱 업체인 범블과 매치그룹, 차량 공유 업체인 우버와 리프트 등 4곳이다.

데이팅앱 범블의 휘트니 울프 허드 CEO. /AP 연합뉴스

◇데이팅앱과 차량 공유 업체만 공개 반발

텍사스주 오스틴에 본사가 있는 데이트 앱 ‘범블’은 최근 텍사스에서 낙태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구제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낙태하려는 여성을 텍사스 외 다른 지역으로 데리고 가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 업체인 ‘매치그룹’의 샤 두베이 CEO도 낙태 금지법에 공개 반발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를 통해 “보통 우리 회사는 우리 사업과 연관되지 않는 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는 텍사스에 사는 여성으로서 내가 개인적으로 침묵할 수가 없다”며 낙태 시술이 필요한 근로자와 부양가족을 지원하는 기금을 직접 만들겠다고 밝혔다.

데이팅 앱 업체들이 낙태 금지법을 공개 반대하는 것은 이 회사를 이끄는 CEO가 여성인 점이 크게 작용했다. 범블은 “우리 회사는 여성이 설립했고, 여성이 이끌고 있다”며 “회사 설립 첫날부터 우리는 가장 취약한 이들을 지지해왔다. 우리는 퇴행적인 법률에 맞서 계속 싸울 것”이라고 했다.

차량 공유 업체 우버와 리프트도 지난 3일 낙태 금지법을 강력히 비판하며 소속 운전기사들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차량 공유 업체들이 텍사스주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 법이 불법 낙태를 시술하거나 방조한 사람도 소송을 당하고 손해배상을 하도록 정해놨기 때문이다. 낙태를 시도하려는 여성을 병원까지 태운 차량 공유 업체 운전기사도 소송 대상이 되는 것이다.

차량 공유 업체 입장에서는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낙태 제한법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리프트는 운전기사가 피소되는 상황에 대비해 기금을 조성하고 법률 비용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다라 코스로샤히 우버 최고경영자(CEO)도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려 “고객을 원하는 곳으로 태워주는 운전기사들이 위험을 감수해선 안 된다”고 글을 남겼다. 우버도 피소되는 운전기사들의 법률 비용을 전액 부담하겠다고 밝혔다.

차량 공유 업체 리프트. /AFP 연합뉴스

◇생각보다 적은 기업들의 반응

범블, 매치그룹, 우버, 리프트 등 4곳의 테크 기업이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에 공개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생각보다 공개 반대하는 기업이 적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동안 애플, 아마존, 구글 등 빅테크 기업과 실리콘밸리 크고 작은 테크 기업들은 흑인 문제, 동성애자 인권 문제, 아시안 혐오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전혀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심지어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던 일론 머스크도 텍사스주 낙태 금지법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일론 머스크는 지난 2일 낙태 금지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밝히지 않은 채,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만 했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이 이번 건에 입을 다무는 이유는 낙태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미 정치 전문지인 더 힐은 “미국 기업들은 최근 몇 년 간 사회 문제, 정치적 투쟁에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지만 이번엔 다르다”며 “낙태 문제는 기업들이 절대 건드리지 않는 사람들의 종교적 견해와 관련이 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텍사스주에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기업들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텍사스는 이들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를 할인해주는 등 다양한 혜택을 준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높은 집값과 물가로 인해 실리콘밸리를 떠나 텍사스 오스틴 등으로 이주한 기업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