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영국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전날보다 7% 오른 섬(therm·열량 단위)당 1.65파운드(약 2671원)를 기록했다. 이는 연초 대비 3배가 넘는 가격으로, 2014년 2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8월 이후에만 무려 70% 넘게 올랐다. 유럽뿐 아니다. 미국 천연가스 선물 가격(헨리 허브 가격)은 올 1월 대비 2배 가까이 올랐다. 난방 수요가 몰리는 겨울을 앞두고 국제 천연가스 선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것이다.
보통 천연가스는 국제 유가와 연동해 움직인다. 하지만 최근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에서 보합세인 반면, 천연가스만 치솟는 것은 ‘탄소 중립의 역설’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석탄 발전을 줄인 상태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풍력·태양광 등 재생 에너지 발전량이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상대적으로 탄소 배출량이 적은 천연가스 발전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친환경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규 가스전 발굴은 지지부진하다. 한국을 비롯해 천연가스 발전을 늘리는 국가들은 전력 생산 비용 급증이라는 부메랑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수요는 느는데 공급은 부족··· 친환경의 역설
그동안 천연가스는 석유·석탄 등에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넘어가는 데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유럽 등 선진국들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석탄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고 태양광·풍력 등 재생 에너지 발전을 늘렸다. 또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재생 에너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스 발전을 늘려왔다.
하지만 최근 북해 등 유럽에서 풍력 발전량이 급감하면서 적신호가 켜졌다. 바람의 양에 따라 발전량이 급변하는 재생 에너지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석탄발전소가 폐쇄된 상황에서 전력 공백은 대부분 가스 발전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유럽에서 천연가스 가격이 한 달 새 70% 이상 급등한 것이다.
하지만 중동·동남아에서 새로운 가스전 발굴은 지지부진하다. 환경단체와 투자자들은 천연가스 역시 화석연료이며 탄소 중립에 역행한다고 거세게 비판해, 기업들이 천연가스 개발(E&P·탐사 및 생산)을 사실상 중단해 버렸다. 앤디 칼리츠 국제가스연맹 사무총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기후 활동가들이 가스를 석탄·석유와 한 덩어리로 묶는 바람에 가스 공급이 늘지 않고 있다”며 “결국 에너지 가격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에너지 안보는 더욱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 비용 급증··· 전기료 인상 압박 커져
국제 천연가스 가격 상승은 곧바로 우리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으면서 한전의 전력구입비 부담도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한전은 탈원전 상황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석탄 발전을 줄이고 LNG 발전은 늘리고 있다. 한전의 지난 7월 LNG 발전량은 전년 동기 대비 52%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7월 LNG 발전 단가는 kWh(킬로와트시)당 121.31원으로 지난 6월과 비교해 20%가량 급증했다. LNG 발전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이다.
천연가스 가격 급등은 한전의 재무구조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전은 올해 1분기엔 국제 유가 하락세 덕분에 5716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2분기엔 LNG 발전이 늘면서 764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019년 4분기 이후 6분기 만의 적자다.
한전은 오는 23일쯤 4분기 전기요금 인상 여부를 결정한다. 정부는 올해부터 연료비를 전기요금에 반영하는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했지만, 2·3분기 연속 물가 안정을 이유로 동결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천연가스 값 상승을 감안하면 한전이 전기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값싼 원전 비중을 올리지 않는 한 국민들의 전기요금 부담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