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길동 사거리 부근의 GS칼텍스의 H강동 수소충전소엔 하루에 현대자동차 넥쏘와 시내버스 등 60여 대의 수소차가 충전을 위해 들른다. 이곳에서는 수소 보관·충전 관련 기술을 실험하며 축적한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작년 문을 연 이 수소 충전소를 수소 사업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 4사가 ‘탈(脫)석유’ 시대를 준비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배터리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SK이노베이션은 물론 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3사도 정유 비중 줄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와 수소 사업에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물론, 기존 주유소 네트워크를 수소차 충전 및 물류 허브로 전환하는 사업도 활발하다.

/자료=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GS칼텍스

◇미래 불확실한 정유 사업 점차 축소

국내 1위 정유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지난 7월 열린 중·장기 사업계획 설명회에서 정유 부문에 대한 신규 투자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신 배터리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하기 위해 내달 1일 배터리 부문 분사 후 기업공개에 나선다. 앞서 2019년엔 전기차 배터리 부품인 분리막을 생산하는 사업부를 분사해 신설 자회사 SK IET도 세웠다. 지난 5월 상장한 SK IET의 시가총액은 15조원으로, 모회사 SK이노베이션(23조원)의 3분의 2에 달한다.

에쓰오일은 수소 분야에서 사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수소 연료전지 전문 스타트업인 FCI 지분 20%를 확보했고, 최근엔 삼성물산과 수소 생산부터 운송·활용까지 전 분야에서 협력하는 파트너십을 맺었다. 에쓰오일이 수소 사업에 주목하는 것은 모회사인 세계 최대 석유 기업 사우디아람코의 사업 방침과도 연관성이 있다. 아람코는 탈석유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천연가스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내년 상장을 추진 중인 현대오일뱅크도 수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지난 8월 고순도 수소 생산 설비를 대산공장에 구축한 데 이어 수소 연료전지용 분리막도 올해부터 생산할 계획이다. 오일뱅크 측은 “2030년까지 정유 부문 매출 비율을 지금의 85%에서 45% 수준으로 낮출 계획”이라고 했다.

GS칼텍스는 수소 생산과 충전소를 중심으로 사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경기 평택에 건설 중인 연산 1만t 규모 액화수소 플랜트가 2024년 완공되며, 한국동서발전과 공동으로 투자한 15MW(메가와트) 규모 수소연료전지 발전소는 2023년부터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전기차 시대 가속화…코로나까지 영향

국내 정유업체들이 탈석유에 속도를 내는 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멀게만 느껴졌던 전기차 시대가 성큼 다가온 가운데 코로나로 인한 실적 충격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국내 정유 4사는 지난해 코로나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면서 한 해 동안 총 5조원이 넘는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전 역대 최악이었던 2012년 약 2조원 적자와 비교해 2배가 넘는 수준이다. 최근엔 석유 수요가 회복되면서 실적이 반등하고 있지만, ‘반짝 호황’도 곧 끝날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 제네시스가 2025년까지 내연기관 신차를 단종한다고 밝히는 등 완성차 업체들이 빠르게 전기차·수소차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상범 대한석유협회 팀장은 “정유회사들은 가장 큰 수요처인 내연기관 자동차가 10년 후 급감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소 등 신사업은 실제 상용화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불확실하다는 건 우려를 낳는다. 그때까지 석유 사업에서 안정적 수익을 내며 생존해야 하는 것이다. 김형건 강원대 교수(경제학)는 “정유사들이 신사업이 수익성을 낼 때까지 국내에서는 항공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하고, 시장이 커지는 동남아시아 등 신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