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전 서울 원서동 사옥에서 만난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은 인터뷰 내내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런 단호한 모습은 어머니를 닮은 듯했다. 그는 “어머니는 평소엔 자애롭지만 자녀들이 어떤 선을 넘었다 싶으면 며칠이고 굶게 했다. 그때 당신도 같이 굶었다. 도저히 잘못을 안 고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여러 사람을 인터뷰했지만 오전 6시에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은 ‘한샘’ 조창걸(82) 명예회장이 처음이었다. 그 시각 서울 원서동 태재 재단 사무실을 갔더니 그는 동 터오는 창을 마주 보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새벽 4시 40분쯤 이곳에 출근한다고 했다. 군더더기 없는 사무실엔 이탈리아 유명 산업 디자이너 에토레 소트사스가 만든 알록달록한 가구 몇 점이 놓여 있었다.

1970년 한샘을 설립해 국내 1위 가구 기업으로 키운 그에 대해 세상은 아는 게 별로 없다.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릴 정도로 대외 활동이 드물었고 사생활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2020년 9월에 나온 ‘한샘 50년’ 사사(社史)에도 조 회장의 개인사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 한 줄, 사진 한 장 없다. “내 얘기가 들어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넣지 말라”는 그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런 조 명예회장이 지난달 사재 3000억원가량을 출연해 ‘태재 미네르바 대학’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7월 자신의 한샘 지분(15.45%)과 특수관계인 지분을 사모펀드 운용사에 매각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9월 사모펀드 운용사가 롯데쇼핑을 전략 투자자로 선정한 직후다. 매각 대금은 1조~1조3000억원으로 알려졌다. 대학 설립 자금은 그중 일부다.

평생 일군 회사를 매각해 혁신 대학을 만들겠다고 나선 조 회장을 6~7일 만났다. 그가 언론과 인터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 명예회장은 “태재 미네르바 대학을 알리기 위한 일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설득했다”고 했다. 태재(泰齋)는 주역에서 따온 말로 인류 공영의 실현을 뜻한다고 했다.

◇위기가 온다

-왜 지금 다시 대학을 만들려고 하나.

조 명예회장은 이 첫 질문에 대답 대신 “닥쳐올 한반도의 위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기자가 머뭇하자 그의 얼굴이 화난 듯 살짝 붉어졌다.

“닥쳐올 한반도의 위기를 넘으려면 리더의 역할이 절실하다. 우리는 리더가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해 여러 차례 재난을 맞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와 남북 분단이 그렇다. 특히 우리에게 6·25와 남북 분단을 안긴 미·중(美中) 갈등은 70년이 지난 지금 더 아슬아슬하고 첨예하다. G2 반열에 오른 중국이 미국과 맞붙으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수 있고 지정학상 가장 큰 피해는 우리나라가 입게 된다. 한국이 국민소득 3만달러에 진입했다지만 국제 정세 틀 안에선 유리 그릇보다 약하다. 이 위기를 제대로 진단하고 예방할 수 있는 리더를 키워야 한다.”

-기존 학교에선 그런 인재를 키울 수 없나.

“디지털이 가져올 사회 변혁을 읽어내고 위기 상황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기존 대학은 교수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공급하는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 하버드·스탠퍼드 같은 명문대도 건물과 캠퍼스, 스포츠팀 운영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다 보니 등록금은 계속 오르고 학생 맞춤 교육은 요원하다. 대안 혁신 모델을 찾다 미국 ‘미네르바 대학’을 발견했다.”

미네르바 대학은 유명 벤처기업가 벤 넬슨이 2014년 세운 학교다. 학생들은 캠퍼스 없이 인터넷 화상 교육으로 수업하는 대신 재학 기간 중 6개월씩 세계 7개 도시에 머물며 기숙사 생활을 한다. 매년 150명 남짓한 신입생 모집에 각국에서 2만명 넘게 지원한다.

조 명예회장은 이런 모델을 국내에 도입하는 ‘태재 미네르바 대학’을 설립하기로 하고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가 이사장을 맡고,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김용학 전 연세대 총장, 김도연 전 포스텍 총장, 구자문 전 선문대 부총장 등이 이사로 참여한다. 2023년 3월 개교가 목표다. 태재 미네르바 대학의 학생 선발 방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조 명예회장은 “태재 미네르바 대학에선 학생들이 미국·중국·일본·러시아와 우리나라를 돌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고 했다.

-왜 4개 나라인가.

“한반도와 지정학적·외교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부대끼는 나라들 아닌가. 이 나라들에서 살고 겪으며 생기는 각종 문제를 해결해 본 인재만이 향후 그들과 얽힌 문제도 풀 수 있다. 이 네 나라를 잘 알고 이해해야 닥쳐올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5년 후엔 한국만의 커리큘럼을 운영할 계획이라 들었다.

“개교 후 첫 5년간 미네르바 대학의 노하우와 시스템을 철저하게 배우고, 5년 후엔 미네르바 대학이 놓쳤던 부분을 보완하는 시스템을 완성할 것이다. 서양의 선진 시스템도 동양의 통합적 사고를 만나야 온전해진다.”

◇200만원의 힘

조 명예회장은 1970년 서른한 살 때 다니던 설계 사무소를 나와 누이에게 빌린 200만원으로 ‘부엌 가구 전문 회사’ 한샘을 설립했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23㎡(7평) 매장을, 불광동엔 비닐하우스로 된 330㎡(100평) 공장을 차렸다. 대부분 가정이 연탄 아궁이에 밥을 하고 난방하던 시절이다. 조 명예회장은 “다들 ‘부엌 가구를 만든다니 미쳤다’고 비웃었다”고 했다.

회사 설립 당시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 문을 연 한샘 직매장. 불과 23㎡(7평)였다. /한샘

-왜 하필 부엌 가구였나.

“건축가에게 가장 골치 아픈 건물은 주택이고, 그중 부엌 설계가 제일 까다롭다. 물과 불, 전기가 오가다 보니 집 안 사고의 40%는 부엌에서 발생한다. 낙후된 한국의 주거 환경을 혁신하려면 부엌이 바뀌어야 했다. 다른 회사들이 스테인리스스틸 싱크대 정도만 만들어 팔 때, 부엌 공간과 동선을 설계해 아궁이 연탄 갈던 주부들이 허리 펴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단돈 200만원으로 출발했지만 성장은 빨랐다.

“200만원밖에 없어서 성장이 빨랐다(웃음). 한샘의 경쟁력은 자본이 없는 데서 나왔다. 남들보다 가진 게 없어서 몇 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1971년 여의도 시범 아파트가 처음 분양될 때, 다른 회사들은 큰 대리점을 만들고 홍보했지만 우린 돈이 없었다. 아파트 설계도에 맞춘 모델 몇 개를 만들고 사진 찍어 입주민들에게 ‘당신네 부엌을 이렇게 만들려면 예산이 이만큼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견적을 우편으로 보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사업은 자본과 조직이 있어야 성공한다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면 성공한다.”

-창업 이후 매일 새벽에 출근했다고 들었다. 직원들은 새벽 5시 회의에 익숙하다고 하더라.

“리더가 늦게 나와 일하면서 어떻게 구성원을 이끌겠나. 새벽 일찍 일어나 어떻게 일을 분배할지 명확하게 계획을 수립해 놓아야 현장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일을 마칠 수 있다.” 한샘은 창업 15년 만에 부엌 가구 부문 1위, 30년 만에 인테리어 가구 부문 1위를 달성했다. 한샘의 지난해 매출은 2조675억원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끝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자주 말한다고 들었다.

“남을 앞서려면 상상력 외엔 답이 없으니까. 인테리어 가구 사업에 진출하면서 쇼룸 전체를 거실과 침실, 공부방과 서재까지 집 안 공간처럼 꾸며서 보여줬다. 방배동 구석에 있는 쇼룸이었지만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보려고 몰려왔다. 한샘은 번듯한 곳에서 시작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 줄 알았다.”

-그렇게 일군 한샘을 1994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들은 회사가 일직선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을 보며 대단하다고 했지만, 빨리 성장한 만큼 사고도 많았다. 전문 경영인이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부엌을 넘어 시스템 가구를 만드는 다음 단계도 준비하고 싶었다. 2012년 한샘드뷰연구재단을 설립해 디자인 연구를 시작했다.”

-주택과 도시 패러다임을 바꿀 연구를 하고 있다던데.

“스마트홈과 스마트시티를 설계하는 연구소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사물 인터넷의 발달로 침대·의자·화장실을 오가는 사람이 뭘 먹고 무엇을 마시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됐다. 사람이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를 측정하고 알려주는 집을 만들고자 한다. 침대나 의자가 ‘당신 이렇게밖에 안 움직이면 언제 아플 것이다’를 말해주는 것이다. 종국엔 시민의 질병·사고를 예방하는 스마트 도시를 설계하는 것이 목표다.”

◇돈 쓰는 이유, 돈 버는 이유

-아들에게 경영 승계를 할 수 없게 돼서 한샘을 매각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자녀 누구에게도 적성에 맞지 않는 경영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나 또한 한샘 경영보다 시급한, 태재 미네르바 대학 운영을 하고 싶어 회사 지분을 정리한 것뿐이다.”

조 명예회장의 장남 원찬씨는 2002년 사망했다. 세 딸은 한샘과 계열사 일부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뿐 경영 활동엔 나서지 않고 있다. 장녀는 미국 의학대학 교수이고, 다른 두 딸은 가정주부다. 조 명예회장은 “아이를 온전히 키우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겠느냐”고 했다.

회사를 정리하는 게 정말 아쉽지 않았을까. 조 명예회장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돈을 벌었고 이젠 그곳에 쓸 뿐”이라고 했다. 태재 미네르바 대학 학생의 절반가량은 학비 걱정 없이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준비위원회 이사진에게 ‘돈 아낄 생각하지 말고 최고로 투자하자’고 했다. 여력이 닿는 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조창걸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 대광고,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200만원으로 창업한 한샘을 굴지의 인테리어 기업으로 키워냈다. 2015년 3월엔 ‘태재재단(옛 한샘드뷰연구재단)’을 설립했다. 매일 새벽 2시쯤 깨서 4시 40분에 출근하고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든다. 5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종교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다. 유일한 취미는 독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