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수도권 한 대학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한 이모(25)씨는 올 들어 지금까지 롯데제과·쿠팡·현대제철과 같은 기업 20여 곳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이씨는 “서류 전형이라도 통과한 경우는 7곳뿐이었다”며 “이름을 처음 들어본 회사에도 서류를 넣었는데 다 불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IT(정보 기술) 분야 채용을 노리고 컴퓨터활용능력·데이터분석가·전자상거래관리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공대생들과는 애초에 경쟁이 안 된다”며 “언론에서 말하는 취업포기족 이야기 들었을 땐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일할 직장을 찾지 못해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대학생이 크게 늘고 있다. 갈수록 취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학생들 스스로 취업 문턱을 넘기엔 자신의 스펙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구직 활동을 단념하는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취업을 위해서 달려왔는데 번번이 불합격하다 보니 자신의 기술이나 지식이 취업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좌절하며 취직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65%가 구직 단념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 4년제 대학 3~4학년 재학생과 졸업생 2713명을 대상으로 최근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65.3%는 구직 단념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가장 많은 33.7%는 구직 활동을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23.2%는 의례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냥 쉬고 있다는 응답자도 8.4%였다.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10명 중 1명(9.6%)에 불과했다.
대학생과 대졸자 상당수가 이처럼 구직을 단념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가진 실력에 비해 취업 문턱이 턱없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설문에 참여한 응답자 중 64.9%는 ‘역량·기술·지식 등이 부족해 더 준비하기 위해’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구직자 간 스펙 쌓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안 그래도 높았던 취업 문턱이 끝없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김모(26)씨도 “대학 시절 다양한 인턴, 대외 활동에 참여하며 스펙을 쌓아왔고, 졸업 전부터 여러 기업에 입사 지원을 했지만 서류 단계에서 다 떨어졌다”면서 “취업 준비에 자신감이 사라져 취업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으로 눈을 돌렸다”고 말했다.
◇현실 도피하는 대학생들
대학생들은 취업 시작부터 줄줄이 서류 전형에 떨어지면서 자신감과 자존감이 크게 낮아진 상황이다. 한경연 조사에 따르면 취준생들은 평균 6.2회 입사 지원을 하고 있지만 실제 서류 합격을 한 것은 1.6회로 서류 전형 합격률도 25.8%에 그치고 있다.
대기업들이 신규 채용의 80% 이상을 이공계 출신으로 충원하면서 비(非)이공 계열 대학생들은 극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수도권 4년제 대학 체육학과를 지난 8월 졸업한 하모(23)씨는 “일반 기업에 취업하자니 전공이 체육학과라서 갈 곳이 없었고, 대한체육회와 같은 체육 단체에 들어가려고 하니 체육 관련 전공 아닌 사람들도 고스펙을 쌓아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겁먹어서 포기했다”면서 “요즘 경영·경제학과가 아니면 인문대생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니까 도피성으로 외국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4년제 대학에서 인문 계열을 전공한 유모(25)씨는 “막상 취업 시장에 나와보니 마케팅·회계 직군밖에 지원할 곳이 없었는데 그마저도 대부분 경력직만 뽑아서 아예 서류도 내기 어려웠다”면서 “노량진·강남에 있는 유명 공무원 시험 학원에 가서 상담도 받아보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어서 아예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대학이 나서서 취준생을 위한 직무 능력 양성 교육을 적극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중소기업 일자리를 청년 눈높이에 맞게 끌어올리는 게 맞겠지만 당장 일자리가 급한 청년들에게는 무책임한 얘기”라면서 “정부와 대학이 나서서 구직 활동 중단 기간 직무 능력을 양성할 수 있는 지원 프로그램을 촘촘하게 만드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