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기 용인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노사 임금 협상. 삼성전자는 지난해 노조 설립에 따라 창사 이래 올해 처음 노사 임금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 자리에서 노조는 “경쟁사인 SK하이닉스보다 낮은 임금과 복지 수준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다”며 전 직원 연봉 1000만원 일괄 인상, 코로나 격려금 350만원 지급, 매년 영업이익 25% 성과급 지급을 요구했다. 회사 측이 “업계 최고 대우는 해주겠지만, 일시에 대규모 인상은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면서 양측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국내 기업에서 임금 인상 요구가 도미노처럼 확산하고 있다. 올해 게임 업체와 네이버·카카오 등 판교 IT 기업에서 촉발된 임금 인상 러시가 삼성전자·현대차 같은 대기업을 넘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본지가 국내 매출 상위 30대 기업의 상반기 기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급여 총액은 전년 동기 대비 9.7% 올랐다. 같은 기간 총 직원 수는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상반기에 수령한 1인당 평균 급여는 4317만원으로 전년보다 8.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에선 기업 실적이 나빠도 임금을 깎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높은 주거 비용과 물가로 힘들어하는 젊은 직원들의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에 큰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MZ세대 연봉·성과급 불만에 골머리 앓은 기업들
삼성전자 익명 게시판에는 ‘판교 기업들 연봉을 보라’ ‘이천 쌀집(SK하이닉스)에 연봉이 역전될 상황’ 같은 임금 관련 내용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올라온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30대 젊은 직원, 특히 개발자 직군은 임금에 따라 워낙 자유롭게 이직을 하기 때문에 연봉을 얼마로 책정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기본급 8%의 임금 인상을 결정했던 SK하이닉스는 연말을 앞두고 이번엔 성과급 고민에 빠졌다. 올해 초 성과급 논란이 불거진 SK하이닉스는 직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기본급 200% 상당의 자사주를 추가로 지급했다. 자사주는 바로 처분할 수 없고 4년간 보유해야 하는데 지급 당시에 비해 주가가 크게 떨어지자 직원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다. 한 직원은 “연말 성과급으로 또 자사주를 지급하면 단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임금을 9% 인상했던 LG전자는 지난달 성과급 체계를 또 개편했다. 사업 부문별이 아닌 회사 전체 매출·영업이익을 기본적으로 적용해 사업 부문별 성과급 격차를 줄이고, 성과급 규모도 늘리기로 한 것이다. 임금 인상에 보수적이었던 LG전자가 파격적 임금 인상과 성과급 체계 개편을 제시한 것은 지난 3월 MZ세대가 주도해 결성한 LG전자 사무직노조 출범의 영향이 컸다. 5대 그룹 인사팀 고위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지 않던 LG전자가 연봉 9%를 인상하자, 우리 회사 직원들 사이에서도 임금 인상 요구 목소리가 커져 상당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실적 추락 땐 과도한 임금 부메랑”
국내 기업들의 임금 인상 움직임은 네이버·카카오·게임 회사 등 판교 IT 기업들이 개발자 확보 전쟁에 나서면서 시작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올 상반기 1인당 평균 급여는 각각 8028만원, 8046만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각각 33%, 51%씩 급등했다. 게임 회사인 엔씨소프트의 상반기 1인당 평균 급여 역시 6300만원으로 삼성전자(4800만원)·SK하이닉스(5858만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이장욱 엔씨소프트 IR 실장은 지난 1분기 실적 발표 때 “특별 성과급 지급으로 인건비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영업이익이 줄었다”고 말했다. 실제 엔씨소프트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55.8% 감소했다.
기업인들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 30대 기업의 영업이익은 작년보다 2배 가까이 늘었지만 내년엔 인플레이션과 반도체 공급난, 물류 차질 등의 여파로 글로벌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내년 실적 추락 땐 과도한 임금 인상이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김용춘 한경연 고용정책팀장은 “고임금 상황에서 실적이 나쁘면, 결국 전체 인원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하거나 신입 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