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사립대 A교수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 두 곳, 중앙 부처와 부처 산하기관 위원회 각 1곳, 지방자치단체 자문위원회까지 총 5개 위원회에서 활동 중이다. A 교수는 위원으로 와달라는 곳이 2~3군데 더 있지만 학교 강의를 할 시간이 없어 거절하고 있다. 그는 “정부·지자체가 중요 결정을 할 때 책임회피용 위원회를 점점 더 만드는 것 같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통령·국무총리·중앙 행정기관에 설치된 정부기관 위원회가 사상 처음으로 600개를 넘어섰다. 본지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공동으로 분석한 결과, 올 6월 말 현재 행정기관 위원회법에서 관리하는 위원회 개수는 총 622개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위원회는 매년 1000개씩 늘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지자체 위원회 수는 정부기관 위원회 수의 43.6배인 2만7000여 개에 달했다. 2015년만 해도 2만1700여 개 수준이었는데, 최근 5년간 연평균 1000개씩 증가한 것이다. 위원회 한 곳당 위원 수를 10명이라고 가정하면, 전국 각지에 27만명의 위원들이 있는 셈이다. 지자체 전체 공무원 숫자(29만명)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정부가 주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외부로 떠넘기는 관행이 고질화하면서 나라 전체가 ‘위원회 공화국’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전문가의 지식을 활용한다는 본래 위원회 설립 취지를 살리고, 형식적으로 운용되는 위원회는 과감하게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연구기관 B박사는 “요즘 직업이 위원”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6곳 위원회 소속인 B박사는 “일부 위원회는 형식적으로 회의를 하며 본인들 입맛에 맞는 결정을 내리는 데 병풍으로 활용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만, 경력 관리에 도움이 되고 용돈벌이도 되기 때문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매년 늘어나는 위원회로 대한민국은 위원회 공화국이 되고 있다. 중앙 정부 기관 위원회는 올해만 37개 늘어 최근 10년 동안 가장 큰 증가세를 기록했다. 올해 국회에서 44개 위원회를 새로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내년에 또다시 신기록을 쓸 전망이다. 정부의 ‘위원회 정비계획’에도 불구하고 위원회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50개 가까운 위원회가 정리됐는데, 이후부터는 계속 증가곡선을 그렸다.

위원회 숫자가 폭증하면서 내실 있는 운용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앙 부처 공무원은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를 성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며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622개의 위원회 중 지난 1년간 회의를 한 번도 개최하지 않은 위원회는 70곳이 넘었다. 딱 한 번 개최한 곳도 69곳에 달해, 위원회 설립 취지에 맞게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됐다.

지방자치단체 위원회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지자체 위원 가운데는 1년간 회의를 한 번도 개최하지 않은 ‘식물위원회’가 25%에 달했다. 일부 지자체 위원회는 황당한 규제정책을 내놓는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용도폐기된 아파트의 난방용 대형 굴뚝이 과거 건축과 시민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 보존물이라며 재건축조합 측에 굴뚝 존치 방안을 검토하라고 요청해 건설업계의 큰 반발을 샀다. 한 중견 기업인은 “사업 승인을 받을 때 지자체 위원회 통과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난해 위원회 결정에 따라 새로 추가한 조치에 대해 올해는 위원이 바뀌면서 불가 통보를 받는 등 주먹구구식 위원회 운영이 경영에도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위원회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공무원들이 새로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책임 회피용으로 만들거나, 이미 정해놓은 정책 방향을 밀어붙이기 위해 명분 쌓기용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면피용 위원회가 대다수라는 이야기다. 최근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상향 조정해 발표한 2050 탄소중립위원회의 경우, 소속 위원 숫자만 97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실질적인 논의나 합의 도출보다 정부가 결론을 정해놓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교수는 “정부가 위원회 소속 전문가들의 토론 결과를 따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위원회를 유도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위원회 전문가로 부처나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주로 영입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의견 수렴 절차라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매년 최저임금인상률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경우 근로자, 사용자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해 결국 정부가 임명하는 공익 위원들의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