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앱) ‘당근마켓’은 2016년 첫 기관 투자(시리즈A)로 13억원을 받았다. 창업 후 현재까지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는 당근마켓에 대한 투자금액은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2018년 57억원, 2019년 400억원, 올해 1800억원을 투자받았다. 지난 5년간 2270억원의 사업 자금을 바탕으로 성장한 당근마켓의 기업가치는 올해 3조원을 넘어섰다. 당근마켓에 투자한 투자사 21군데 중 대부분이 알토스벤처스, 카카오벤처스, 소프트뱅크벤처스와 같은 국내외 벤처캐피털이었다.
스타트업이 세계 경제에서 맡은 역할이 커지면서 벤처캐피털이 산업계의 핏줄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혁신적이거나 성장성이 높은 신생 기업이 자본이 필요할 때 위험을 감수하고 수혈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담보로 제출할 유형 자산이 없는 스타트업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대신 미래의 기업 가치를 내세워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받고, 벤처캐피털은 투자한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를 키운 뒤 투자금의 수십 배에 이르는 금액을 회수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고위험 고수익)’ 투자 방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벤처캐피털은 소프트웨어 회사뿐만 아니라 바이오기술, 암호 화폐, 메타버스와 같이 투자 위험이 있는 곳에 남들보다 먼저 투자해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 백신을 생산해낸 모더나도 스타트업 출신으로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이라는 벤처캐피털의 초기 투자를 받으며 성장했다.
◇세계 경제 핏줄이 된 VC
만약 당근마켓이 은행에서 대출받아 사업했다면, 창업자들은 담보 능력이나 신용도를 내세워서 초기 자본을 빌려야 했을 것이다. 사업을 계속 하기 위해 추가 지금을 확보해야 하지만 창업 2~3년 동안 수익이 나지 않고 담보로 잡힐 수 있는 공장이나 기계도 없는 상황에서 은행 대출심사에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사업을 접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당근마켓은 위치 기반 중고 거래라는 아이디어로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았고, 앱 이용자가 꾸준히 증가하자 투자 금액도 여기에 비례해 커졌다.
벤처캐피털은 고사 위기에 있거나 수익이 나지 않는 스타트업에 자금을 수혈해 이들의 성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액셀러레이터(보육 기관)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창업 3년 차였던 크래프톤(당시 블루홀)은 매출이 부진한 데다가 엔씨소프트와의 소송까지 겹쳐 일명 ‘데스 밸리’(스타트업이 사업 확장 시기에 매출 부진과 자금난을 겪는 현상)로 불리는 폐업의 기로에 놓였다. 때마침 벤처캐피털 여러 군데서 약 180억원을 투자받아 위기를 넘겼다. 크래프톤이 지난 8월 상장했을 때 12년 전 99억원을 투자한 케이넷투자파트너스의 지분가치는 1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벤처캐피털 카카오벤처스가 2013년에 설립한 ‘케이큐브1호 벤처투자조합’도 두나무 창업 초기에 2억원을 투자했는데 최근 지분 가치가 2조원을 넘어섰다. 국내 최대 암호 화폐 거래소인 업비트를 설립한 두나무는 같은 기간 기업가치가 1만5000배나 뛰었다.
◇증권사도, 사모펀드도…VC판 커졌다
기업 가치가 크게 성장하거나 상장, 인수합병(M&A)한 스타트업으로 대박을 터뜨린 벤처캐피털이 늘어나자 사모펀드, 증권사도 스타트업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이달 초 사모펀드인 IMM프라이빗에쿼티(PE)는 인공지능 로봇 스타트업인 베어로보틱스에 600억원을 투자했다. IMM PE는 제조, 커머스 업체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거래를 위주로 해왔는데 수익 다변화 차원에서 투자 범위를 기술 스타트업까지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올해 삼성증권과 교보증권은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금융 당국으로부터 신기술사업금융업 허가를 받았고, 지난달 교보증권은 2000억원 규모의 ‘교보신기술투자조합1호’를 설립했다. 증권사 23군데가 신기술사업금융업 허가를 갖고 있다. 할리우드처럼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연예인들도 생겨나고 있다. 아이돌그룹 수퍼쥬니어 출신 최시원은 소셜임팩트 스타트업 페이워치에 최근 투자했고, 배우 이제훈은 마켓 컬리 초기 투자자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