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최근 카이스트와 포스텍(포항공대)에 반도체 관련 계약학과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잇따라 발표했다. 카이스트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내년부터 5년간 500명, 포스텍 반도체공학과는 2023년부터 5년간 200명의 신입생을 모집할 예정이다. 학생들은 학부 때부터 반도체 설계와 공정을 배우고 삼성전자에서 현장 실습과 인턴도 한다. 또 등록금과 장학금을 지원받고 졸업 후에는 삼성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대기업들이 대학과 손잡고 인재 양성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맞춤형 교육이 가능한 계약학과를 대학에 설립하고, 채용을 전제로 장학금을 지원하는 식이다. 4차 산업혁명 확산으로 인재 수요는 치솟고 있지만 기업들이 원하는 전문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박상훈

◇반도체·배터리 이어 디스플레이까지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계약학과는 2006년 삼성전자가 성균관대에 반도체학과를 설립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10년 넘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대기업들의 계약학과 설립이 붐을 이루고 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격화되고 있는 글로벌 경쟁을 이겨낼 차세대 인재를 대학에서 키우고 있다. 삼성전자와 협력한 연세대는 올해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신입생 50명을 선발했고 SK하이닉스와 협약을 맺은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도 올해 학생 30명을 뽑았다. 반도체 관련 수업뿐 아니라 현장 실무 교육도 함께 진행된다.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배터리 기업들도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SDI는 내년부터 10년간 한양대에서 배터리융합전공을 이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생 200명을 선발한다. 서울대·포스텍·카이스트에서도 내년부터 10년간 석·박사 300명의 장학생을 선발할 예정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내년 연세대·고려대 대학원에 배터리 관련 학과를 설립해 석·박사를 뽑고, SK온도 울산과학기술원(UNIST)에서 배터리 분야 석사를 모집했다.

계약학과를 설립하는 산업 분야도 확대되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연세대에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를 만들어 2023년부터 신입생 30명을 뽑을 계획이다. 학생들은 전자·전기·물리·화학·재료 등 디스플레이 산업에 특화된 기술을 공부한다. 삼성전자는 고려대와 차세대 미래 통신 기술을 공부하는 차세대통신학과 개설을 논의 중이다.

◇미래 유망 산업 인력 태부족

반도체, 배터리는 글로벌 기업들과 겨루기 위해 기술 경쟁력이 필수적이고 그만큼 인력 수요도 큰 분야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잇따른 계약학과 설립은 기업들이 우수 인력을 채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자원 전쟁에 이어 인력 전쟁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무형 인재가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반도체산업인력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반도체 산업의 인력 부족은 석·박사 200여 명, 학사 900여 명 등 연간 약 1500명 수준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바이오·시스템반도체·미래차·인공지능(AI) 분야 수요는 향후 5년간 14만4400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배터리 산업은 부족한 인력을 약 3000명으로 추정한다(한국전지산업협회).

반면 수도권 소재 대학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원을 늘릴 수 없다. 유망한 학과 정원을 늘리려면 다른 학과의 정원을 줄여야 한다. 최근 10년 동안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의 정원은 55명으로 묶여 있었다. 대학 전공과 산업 현장의 미스매치도 심각하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대졸 신입 사원을 뽑으면 설계 프로그램 사용법 등 1년 가까이 실무 교육을 따로 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정원 외로 학생들을 뽑을 수 있는 계약학과 설립은 기업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지적이다. 안준모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수도권 대학과 달리 카이스트 등 4대 과학기술원은 정관만 고치면 정원을 늘릴 수 있다”며 “대학의 수요자인 채용 기업이나 학생들에게 맞춰 학과 제도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