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호텔 지하. ‘제11회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원자력의 날)’ 기념식 행사와 함께 ‘원자력 잡-테크 페어’(취업 박람회)가 열렸다. 경력이 단절된 이들을 재교육해 원전업계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고, 원자력 전공 대학생 등 구직자에게 원전 관련 중소·중견기업을 이어주겠다는 취지로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올해 시작한 행사다. 호텔 지하의 홀을 빌려 원전 관련 업체와 병원 등 12곳이 부스를 열고 구직자와 대학생들의 취업 상담을 받았다. 취업 사진을 촬영하거나 기업 채용과 관련한 인기 유튜버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행사도 함께 열렸다.
◇썰렁한 취업 박람회
하지만 이날 취업 박람회장은 썰렁했다. 오전 10시 열린 박람회에선 오후 4시가 되도록 방문객을 찾기 힘들었다. 원자력공학과나 방사선과를 전공한 대학생들이 박람회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기업 부스 12곳 중 실제 구직자가 상담받는 부스는 1~2곳에 불과했다. 행사장에 마련된 의자 20여 개는 사람이 많을 때도 절반을 채우지 못했고, 부스를 낸 기업 관계자들이 앉아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경력자 재취업 상담에 나선 한국원자력산업협회 관계자는 “예약된 상담 인원은 10명 이상이었지만 실제 상담하러 온 것은 대학생을 포함해 3명뿐”이라고 했다. 원산협회는 이 행사를 위해 3주간 원자력공학과가 있는 전국 대학에 공문을 돌려 참가를 독려했지만, 이날 사전 등록을 한 대학생은 50여 명 정도였다. 원산협회 관계자는 “코로나 확산세가 심해지면서 행사가 임박해 참석을 취소한 대학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부스를 연 원전 품질 검사 업체 관계자는 “경력 직원 14명을 뽑겠다고 공고했지만 하루 종일 상담받으러 온 구직자가 5명이나 될까 모르겠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탈원전 정책이 추진되기 전에는 직원 300명 규모의 회사였는데, 정부의 탈원전 정책 이후 3분의 1로 줄었다”며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한 원전 바라카 1호 관련 프로젝트가 내년 초 마무리되면 매출이 더욱 줄어들 것 같아 존폐가 위태로운 지경”이라고 했다.
박람회에 참석한 학생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희대 원자력공학과에 재학 중인 이동규(19)군은 “원자력 기술에 뜻을 두고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하고 싶지만, 최근 추세를 보면 석사·박사 학위를 딴 전문 인력들의 일자리가 크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라 우려스럽다”고 했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나모(21)양은 “방사선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원전업계에 종사하시기도 해서 원자력을 복수 전공했는데, 막상 3학년이 되고 취업 준비를 시작하니 결국 병원 취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정부 관계자의 유체 이탈 “지금이야말로 희망과 전진을 이야기하자”
이처럼 원자력업계에선 기초 생태계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만연하고 있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국내 원전 생태계 붕괴에 대한 언급은 없이 원전 수출에 대한 장밋빛 전망만 내놓았다. 행사 주최를 맡은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희망과 전진을 얘기할 때”라고 했다. 정 사장은 “한국 원전업계는 후퇴를 한 적도 없고 중단을 한 적도 없으며 잠깐 움츠렸을 뿐이지만, 새해는 움츠린 자세에서 힘차게 뛰쳐나가는 검은 호랑이의 해가 되길 기원한다”고 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원전 생태계 경쟁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가동 원전의 안전한 운영과 새로운 수출 시장 확보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미래 유망 원전 기술 발굴과 인재 육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들이 주로 지목한 ‘미래 유망 기술’은 원전 해체와 소형 모듈 원자로(SMR) 개발 등이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래 원자력의 날 행사는 업계에선 잔칫날인데, 올해 잔치는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며 “원전 수출은 분명 긍정적인 성과지만 기초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는 여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