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국인 투자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주한유럽상의 회장의 토론을 듣고 있다./뉴시스

국내에 생산 시설을 둔 한 외국 화학 기업은 지난 1월 중대재해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부터 본국 임원들과도 수시로 화상회의를 열고 로펌 컨설팅도 받았다. 하지만 법 시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화학은 사고가 잦은 업종이 아니지만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피해가 크기 때문에 향후 한국 투자 계획을 재검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내부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 기업들이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공포에 떨고 있다. 법이 요구하는 의무 자체가 불명확한 데다 자국에서는 접한 적이 없는 강력한 수준의 기업 제재 법안이라, 자칫 외국인 CEO들이 줄줄이 징역형을 받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한 외국 기업 관계자는 “만약 외국인 CEO가 형사 처벌을 받는 사례가 한 번이라도 나온다면 어느 외국인이 한국 지사 CEO 직을 수락하겠느냐”면서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 철수 요인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로도 번질 수 있는 심각한 수준의 법”이라고 말했다.

◇”법이 모호한데 어떻게 지키나”

외국 기업들은 “법을 지키고 싶어도 법규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부터 어렵다”고 말한다. 중대재해법은 경영책임자가 CEO인지, 안전관리 담당 임원인지, 최대 주주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준수해야 할 안전·보건 관계 법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법인지를 명시하지 않아 “사실상 법을 지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한 일본계 화학 기업 관계자는 “일본은 워낙 안전을 강조하는 국가라서 중대재해법 통과 이후 곧바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지난 1년간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고 내년에는 중대재해 관련 부서도 신설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법 자체가 모호하고 불명확해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받는 실제 판례가 나와야만 기업들이 어떤 수준의 안전 의무를 지켜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국내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 기업 절반 이상이 내년 1월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으로 외국 기업을 처벌할 경우 국내 투자를 보류하고 사업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 기업들은 중대재해 발생 시 경영 책임자에게 징역형을 부과한다면 외국인 CEO들이 한국 지사 부임을 거부해 경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이후 지난 1년간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와 같은 경제단체들까지 중대재해법 대응책 마련에 나섰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외국 투자 유치를 늘리고 국가 경쟁력을 더욱 키워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중대재해법 시행은 외국계 기업에도 엄청난 짐이 될 것”이라면서 “최소한 억울한 처벌이 발생하지 않도록 면책 근거를 마련하고 경영책임자의 고의나 악의 때문에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경우엔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관련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CEO ‘코리아 패싱’ 우려

외국계 기업들 사이에선 중대재해법으로 인해 외국인 CEO들 사이에서 ‘코리아 패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외국 경제단체 관계자는 “한 번 형사처벌 낙인이 찍히면 CEO로서 경력이 끝나는 것”이라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기업은 한국 지사가 사고 예방을 위해 투자나 생산활동에 보수적으로 나설 경우 실적을 중시하는 본사와 충돌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중대재해법이 국가 간 분쟁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크리스토프 하이더 ECCK 사무총장은 “ECCK는 회원사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중대재해법을 모니터링할 예정”이라며 “내년 법 시행 이후 지켜봐야 하겠지만 회원 기업들에 부당한 부담이 발생될 경우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국 기업의 투자 위축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대재해법의 부작용”이라며 “외국 기업이 한국 법인을 계속 유지하더라도 중대재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사업은 직접 하지 않고 다른 업체에 일감을 넘기는 방식으로 책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가 숨지거나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안전 조치 의무를 위반한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를 형사처벌하는 법.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50인 이상 사업장에는 내년 1월 27일부터 적용되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2024년부터 적용된다.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