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경제 보복 조치를 내린 것은 2019년 7월. 당시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자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기술 개발 지원, 관련 기업 육성책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은 소부장 성과 보고대회를 열고 “일본의 기습 공격에 맞서 소부장 자립을 이뤄냈다”고 했다.
하지만 4일 본지가 최근 4년간 정부 무역통계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한 소부장은 무역 분쟁 이전인 2018년보다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대일본 소부장 수입액은 381억달러(45조7000억원)였다. 2019년 일본이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하자 329억달러로 잠시 주춤했던 수입액은 이듬해 340억달러로 반등했고, 지난해엔 395억달러로 치솟았다.
전체 소부장 수입액 가운데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18.3%에서 지난해 15.9%로 소폭 감소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작년 반도체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으며 전체 소부장 수입액이 2018년에 비해 20%나 증가한 영향이 더 크다. 국내 소재·장비 업계에서도 “일본 업체가 한국이나 제3국에 세운 공장을 통해 한국으로 수출하는 우회로를 택하면서 ‘대일본 수입’ 통계에서 빠진 착시 효과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지난 2019년 일본이 ‘한국에 비수를 꽂았다’고 내세운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일본 의존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인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국내 소부장 기술과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전제는 맞지만, 기술 강국들을 상대로 단기간에 성과를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라며 “특정 국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합작 법인과 투자 유치 등 현실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 삼성반도체도, LG배터리도… 일본산 소재·장비 끊기면 생산 스톱
-日이 장악한 핵심 기술… 갈 길 먼 소부장 국산화
국내 1위 배터리업체인 LG에너지솔루션은 액체 화학물질인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포장하는 핵심 소재 ‘알루미늄 파우치 필름’을 일본의 DNP와 쇼와덴코라는 두 업체에서 수입하고 있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의 한국 수출 규제에 나서자, LG도 재빨리 대체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국내와 중국 업체를 접촉해 제품 테스트도 진행하고, 납품을 받으려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고 했다.
하지만 LG는 여전히 세계시장의 70%를 과점한 두 일본 업체의 제품을 쓰고 있다. 여러 파우치 필름을 테스트해 봤지만 가격과 성능 모두 기준에 미달해 양산(量産)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밖에도 2차 전지의 전극을 안정화시키는 양극·음극 바인더, 전해액 첨가제, 동박(銅箔·종이처럼 얇게 만든 구리) 제조 설비 등 일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제품이 여전히 많다. 이항구 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기업들이 국산화에 나서고 있긴 하지만, 노벨 화학상 수상자를 수차례 배출한 일본이 핵심 기술 특허를 상당수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일본의 기술 특허를 피해가면서 소부장 국산화를 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정부 “해외 대체 공급망 발굴”… 알고 보니 일본 업체 해외 공장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3종 중 하나였던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수입 의존도가 2018년 93.2%에서 지난해 79.5%로 줄었다. 대체 공급망인 벨기에를 발굴해 포토레지스트 수입액을 10배 이상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벨기에 수입 비율은 15.8%를 차지했다. 정부는 ‘일본 의존도를 줄인 성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일본 경제지 니케이는 “한국의 포토레지스트 벨기에 수입분은 일본 JSR의 벨기에 공장에서 제조된 것”이라며 “기만적인 수치 발표”라고 보도했다. 제조 국가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일본 업체의 제품이라는 것이다.
역시 규제 대상이었던 고순도 불화수소는 솔브레인, 이엔에프테크놀로지 등 일부 국내 기업이 국산화에 성공했다. 제조 기술력을 확보해 양산까지 했지만, 여전히 일본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순도 불화수소 생산을 위한 원료 수급부터, 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련 업체가 일본 화학 회사와 지분을 섞은 합작사이기 때문이다. 솔브레인은 일본 스텔라케미파·마루젠케미칼과 함께 세운 훽트에서 원료를 공급받고, 이엔에프테크놀로지의 고순도 불화수소 제조 계열사인 팸테크놀로지는 일본 모리타케미칼(지분 32%) 등과 함께 세운 것이다.
◇소재뿐 아니라 반도체 장비도 日 의존 높아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도 일본 장비가 없으면 공정(工程)에 큰 차질이 생긴다. 예를 들어, 초미세 공정인 나노(㎚·1나노는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단위의 반도체 공정을 진행하는 데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검사 장비는 일본의 레이저텍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한다. 레이저텍의 최대 수출 국가도 한국이다. 이 밖에도 도쿄일렉트론, 에바라제작소 등 반도체 특수 공정에 필요한 장비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일본 업체가 많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담당자와 반도체 장비 공급망 리스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일본 장비 기업에서 100% 독립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반도체용 레이저 절단기는 최근 2년 연속 일본에서 100% 수입했고, 포토레지스트 도포·현상기, 반도체 웨이퍼 식각 등을 위한 분사기, 웨이퍼를 개별 칩으로 절단하는 기기 모두 일본 수입 비율이 90%가 넘는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20년에 반도체 제조 장비 수입 품목을 전수조사한 결과, 일본 수입 의존도가 70%가 넘는 품목이 22개였다”며 “일본이 장비 분야에도 수출 규제를 걸 경우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이와중에… 일본 기업들, 한국에 공장 짓고 ‘메이드 인 코리아’로 국적 세탁
일본 소부장 기업들은 최근 한국에 직접 공장을 짓거나, 한국 기업과 합작 회사를 만들어 설비를 들여오는 방식으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한일 양국 외교 관계 악화로 인한 리스크를 회피하는 일종의 우회 전략인 셈이다. 이렇게 생산되는 소재·부품·장비는 ‘메이드 인 코리아’로 분류되는 데다, 원료를 들여와 한국에서 가공하는 방식이라면 일본 정부의 규제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SK지오센트릭(옛 SK종합화학)은 지난해 12월 일본 화학기업 도쿠야마사와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1200억원을 들여 울산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이 공장은 2024년부터 반도체 웨이퍼 세척 소재로 쓰이는 고순도 용제를 연간 3만t씩 생산할 계획이다. 일본 대표 화학사인 스미토모화학은 작년 9월 한국에 100억엔(1040억원) 이상을 투자해 포토레지스트 제조 공장을 신설하기로 했다. 그동안 스미토모화학은 오사카 생산분을 한국에 수출했지만, 앞으로는 일본에서 원료를 들여와 한국 공장에서 제조해 출하하겠다는 방침이다.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강소기업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 훨씬 이전부터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글로벌 톱 반도체 제조사가 있는 한국에 공장을 세우거나 투자해왔다. 그런데 2019년 일본 정부의 소부장 수출 규제가 일본 기업들의 이런 행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 산하 아시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 이후 일본 반도체 소재·장비 기업이 직접 투자 혹은 합작법인 형태로 한국에 공장을 세우는 사례는 한 해 평균 1건 정도였다. 그런데 2019년 7월 이후 발표된 일본 회사들의 한국 공장 신·증설 건수만 총 5건이었다.
대표적으로 2012년 한국에 진출한 TOK(도쿄오카공업)는 핵심 품목인 포토레지스트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대상 품목에 오르자, 한국 송도 공장을 증설해 포토레지스트를 제조해 납품하고 있다. 한국 법인의 연 매출이 1700억원(2020년 기준)을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일본 소부장 기업이 한국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투자와 고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