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4일 삼성전자의 글로벌 뉴스룸에는 올림픽 관련 내용이 게시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최상위 등급 공식 후원사 ‘톱(TOP·The Olympic Partner)’ 계약을 맺은 유일한 한국 기업이지만, 관련 보도자료 한 건 없이 올림픽을 맞은 것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참가한 선수들에게 ‘Z플립 올림픽 에디션’을 배포하고 선수촌에 쇼케이스를 운영하는 올림픽 후원사로서의 기본적인 마케팅만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 이어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눈에 안 띄는 ‘조용한 마케팅’을 선택했다. 도쿄 때는 현지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던 데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불거진 국내 반일 정서를 고려해 홍보 활동을 자제했다. 이번 베이징에선 미·중 갈등과 중국의 신장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비판 등 국제정치 이슈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미국·영국·호주·캐나다를 비롯한 10여 국가가 이번 올림픽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는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마당에 글로벌 시장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삼성전자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삼성, 도쿄 이어 베이징서도 조용한 마케팅

삼성전자가 맺은 톱 스폰서의 경우 계약 비용만 해도 4년마다 1억달러(약 1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는 첫 계약을 맺은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부터 매 올림픽마다 홍보에 공을 들였다. 개최국 전역에 갤럭시 스튜디오를 열고 대대적인 TV 광고도 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는 그런 홍보를 모두 접었다.

이번 동계올림픽을 후원하는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톱 스폰서는 에어비앤비·알리바바·알리안츠·아토스·브리지스톤·코카콜라·인텔·오메가·파나소닉·프록터&갬블·삼성·도요타·비자 등 13곳이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알리안츠 외에는 모두 도쿄 올림픽 때도 톱 스폰서였던 기업들이다. 이들은 도쿄 올림픽 때는 공식 트위터 계정 등을 통해 올림픽 관련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내놨다. 삼성전자와 달리 국내 반일 정서를 고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는 이렇다 할 마케팅 활동을 전개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스위스 시계 업체 오메가 대변인은 영국 BBC에 “오메가는 베이징 올림픽의 후원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며 “올림픽 경기의 공식 기록을 측정하고 데이터화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라고 했다.

◇ 글로벌 스폰서들도 미·중 사이서 눈치

미국은 이미 자국 기업들에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마케팅 수준을 낮추라고 경고해왔다. 작년 7월 미 의회 청문회에선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이 코카콜라·비자·에어비앤비 등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중국의 신장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을 이유로 베이징 올림픽을 연기하거나 다른 곳에서 개최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고 질의했다. 당시 톰 말리노스키 민주당 하원의원은 코카콜라 관계자에게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을 구체적으로 비판할 용의가 있느냐”고 압박했다.

글로벌 기업 입장에선 중국 시장 역시 놓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미국 눈치 보느라 베이징 올림픽 마케팅에 소홀하다’는 인식이 중국 내에서 퍼지면 대규모 불매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신장위구르의 인권 탄압을 비판했던 H&M·나이키 등 패션 브랜드들에 대한 전국적인 불매 운동이 일기도 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중국 시장이 미국·멕시코에 이어 전 세계 셋째로 큰 시장인 코카콜라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올림픽 에디션 캔을 출시하는 현지 마케팅 활동을 하되, 미국에서는 TV 광고나 올림픽 에디션 캔 출시를 하지 않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