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글로벌 석유 기업들이 7~8년 만에 최대 실적을 거뒀다. 최근 미국·EU(유럽연합)를 포함한 선진국이 탄소 중립 정책을 추진하면서 석유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이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석유 메이저들이 탄소 중립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신규 유정 개발을 위한 투자를 대폭 축소한 반면, 코로나 사태 이후 산업계의 석유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향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급등은 전 세계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키우고 있다.

산업계에선 이런 현상을 두고 탄소 중립 과속에 따른 부작용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탄소 중립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라면서도 “하지만 지금처럼 일방통행식으로 탄소 중립을 밀어붙이면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메이저 석유 기업 7~8년 만에 최대 실적

미국 최대 석유 기업인 엑손모빌은 지난해 230억달러(약 27조530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2014년 이후 7년 만에 가장 좋은 실적이다. 미국의 또다른 메이저 석유 기업 셰브론 역시 7년 만에 최고 순이익인 156억달러(18조6700억원)를 벌었다. 영국 석유 기업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128억달러(15조3200억원)를 기록했고, 영국 석유 기업 셸은 193억달러(23조1000억달러) 순이익을 거뒀다. 두 회사 모두 8년 만에 최고 실적이다. 4대 글로벌 석유 기업은 2020년엔 50억~200억달러 순손실을 냈었다.

지난해 글로벌 석유 기업들이 7~8년 만에 최대 실적을 올렸다. 탄소 중립 정책으로 석유 시추와 정제 관련 설비 투자 규모를 줄였는데 글로벌 산업계의 석유 수요는 늘면서 수익성이 오히려 개선된 것이다. 사진은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원유 시추를 위해 땅을 굴착하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오일 메이저사 실적이 1년 만에 급반등한 것은 신규 투자 감소로 글로벌 석유 시장의 수요·공급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등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 글로벌 원유 생산 설비는 하루 평균 135만배럴 생산 규모만큼 늘었는데 2020년에는 폐쇄된 설비가 더 많아 69만배럴 만큼 줄었다. 석유업계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로 글로벌 경기가 위축된 데다 친환경 정책까지 겹쳐서 석유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도 19만배럴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사태 이후 글로벌 경기 회복과 함께 원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석유 기업들이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것이다. 국제 유가는 7년 만에 10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일 메이저사에 투자한 자산운용사들도 큰 수익을 챙기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대표적인 탄소배출 업종인 오일 메이저사에 친환경 정책을 강하게 요구해 왔지만 정작 배당 등을 통해 큰 수익을 거두고 있다. 셰브론은 실적 발표와 함께 배당금을 6% 늘리겠다고 밝혔고, 엑손모빌도 2년 안에 자사주 100억달러를 매입하겠다는 주주 친화 정책을 발표했다. 블랙록은 엑손모빌 주식 4.63%, 셰브론 주식 4.59%를 갖고 있다. 일각에선 “앞에서만 친환경을 말하고 뒤에선 돈을 챙긴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가 상승으로 물가 불안 우려

탈탄소·친환경 정책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유가가 폭등해 물가가 오르는 일명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난 1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수입물가지수는 132.27로 전월 대비 4.1% 올랐다. 2012년 10월 이후 9년 3개월 만에 최고치다. 국제 유가가 오르면서 수입물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수입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는 40년 만에 최대 폭(7.5%)으로 올랐다.

전문가들의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이사벨 슈나벨 ECB(유럽중앙은행) 집행위 이사는 지난달 “저탄소 경제로 전환은 인플레이션 위험을 낳는다”고 말했고,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도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린 지속가능성 행사에서 “녹색경제로 전환을 너무 서두르는 것은 인플레이션 문제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화석 에너지 가격이 오르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물가 상승에 따른 피해는 모든 국민이 입게 될 것이고, 특히 소득이 낮은 계층에서 느끼는 압박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