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회의’에서 “향후 60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 전원(電源·Power Supply)으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단계적 정상 가동을 할 수 있도록 점검해 달라”고 주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에서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탈(脫)원전 정책을 추진해온 문 대통령이 대선을 코앞에 두고 정책 전환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원전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선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건설 중이던 신한울 3·4호기 취소 등 임기 내내 탈원전 정책을 펼쳐온 문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탈원전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이미 예정된 원전을 내세워 ‘립서비스’ 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0월 2020년 기준 29%인 원전 비율을 2050년까지 6.1%로 축소한다는 계획을 담은 탄소 중립 시나리오를 확정했다.

지난해 말 그린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 발표 때는 EU(유럽연합) 등 전 세계가 녹색 에너지로 인정한 원전을 배제하는 결정을 내렸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현재 원전과 석탄 발전을 합한 주력 기저 전원 비율은 60%를 조금 넘는다”며 “(2050년) 6%대에 그치는 비율로 주력 기저 전원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공급 위기가 현실화되자 결국 원전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는 “임기 중 탈원전을 추진한 적이 없다”며 정책 전환이 아니라고 했다.


◇탈원전 정책에 임기 중 계획보다 원전 5GW 줄어

이날 문 대통령이 언급한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는 2017년부터 차례로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신한울 1호기는 2017년 4월, 2호기는 이듬해 상업운전을 시작할 계획이었고, 신고리 5·6호기도 지난해와 올해 가동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신한울 1·2호기 가동 시기는 올 3월과 내년 3월로 5년가량 미뤄졌다. 신한울 1호기는 ‘북한의 장사정포 공격’ ‘비행기 충돌 위험’과 같은 안전 관련 문제 제기가 이어지며, 완공된 지 15개월 만인 지난해 7월에야 시운전에 들어갔다. 신고리 5·6호기도 2016년 6월 건설 허가를 취득하며 공사에 속도가 붙었지만, 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공사 유지 여부를 두고 공론화가 진행됐고, 29개월 늦은 오는 2024~2025년으로 완공이 늦춰졌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행사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2016년 3월 기준 총 136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하며 탈원전을 정당화했고, 2019년 1월 기업인과 대화에서 나온 한 중소기업인의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요청에 대해서도 “정부 에너지 정책 흐름은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야당 원내대표와 오찬 회동에선 “추가 원전 건설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2018년 4월 문 대통령의 “월성 1호기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라는 발언 직후 올해까지 가동할 예정이던 월성 1호기는 2019년 조기 폐쇄됐고, 천지 1·2호기를 비롯해 경북 영덕과 강원 삼척에서 진행 중이던 추가 원전 건설은 없던 일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전인 2016년 27조원까지 증가했던 국내 원전 산업 매출은 2019년에는 10년 전 수준인 20조원으로 줄어들면서 문 정부 5년 동안 원전 생태계는 망가졌다. 임기 중 원전 설비 용량은 계획보다 5GW(기가와트) 감소했다. 한전은 원전 발전량을 줄이면서 비싼 LNG(액화천연가스)·신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려 지난해 6조원에 가까운 사상 최대 영업손실을 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선언해야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발언이 ‘선거용’이라고 지적한다. 선거를 앞두고 현 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실패 사례로 꼽히는 탈원전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돌리고, 망가진 원전 업계와 원전이 있는 경북 지역 주민들의 표를 의식했다는 것이다. 주한규 서울대 교수는 “아직 준공하려면 몇 년이나 남은 신고리 5⋅6호기를 빨리 가동하라는 건 하나 마나 한 말”이라고 말했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탈원전과 친원전 구도를 깨려는 정치적 노림수”라며 “이미 절차에 따라 시운전 중이거나 공사 중이라 일정을 당기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마치 우리 애가 크면 학교에 갈 거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현재 부지 조성을 마친 채 방치된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를 추진하고, 2020년 9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서 수명 연장을 금지한 원전에 계속 운전 허가를 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내년 4월 40년 설계 수명이 끝나는 고리 2호기를 시작으로 2034년까지 가동을 중지하는 원전은 11기에 이른다. 미국은 현재 최장 80년까지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8년밖에 안 남은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를 달성하려면 기존 원전의 계속 운전이 필수적”이라며 “계속 운전만 허가해도 붕괴 직전인 원전 산업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靑 “원전 없애자고 한 적 없어”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은 처음부터 정치적 프레임이었다는 주장이다. 문재인 정부 내내 원전이 주요 에너지원이기 때문에 당장 끄겠다고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원전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임기 내내 해외 원전 수출도 발 벗고 나섰던 것”이라며 “에너지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몇 년 사이 원전을 없애자는 게 아니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2080년까지 원전의 비율을 줄여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 대통령도 이번 에너지 공급망 회의를 하면서 여러 차례 이 얘기를 하면서 답답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결정을 앞두고도 청와대 일각과 산업부 등에서는 ‘정부의 말 바꾸기’ 등의 비판을 감안해 석탄 발전소 가동을 먼저 검토하자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도 “청와대가 설득력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청와대는 신한울 1⋅2호기, 신고리 5⋅6호기 가동과 관련해서도 “주 52시간제 등에 따른 노동력 부재 등으로 지연됐을 뿐”이라며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고 했다. 특히 청와대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앞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을 비판하고 신한울 3⋅4호기 재추진 등을 주장했는데, 그런 이 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결정이 아니냐”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후보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