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CIS(독립국가연합) 국가로 화장품을 수출하는 A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위기를 맞고 있다. 러시아 업체들이 서방 제재와 루블화 환율 상승을 이유로 대금 지급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수출하는 B사도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로 향하던 선박이 터키로 목적지를 틀면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조용석 한국무역협회 현장정책실장은 “현지에서 새로운 바이어를 찾기도 어렵고, 요즘처럼 물류비가 비싼 상황에서 물품을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중소기업은 곧바로 대금을 받지 못하면 경영 자체가 어려워진다”며 “지금은 수출 안 하는 게 낫다는 기업도 많다”고 전했다.
◇스위프트 제재로 수출 대금 회수 우려 커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제재가 현실화되면서 국내 산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스위프트는 200여 나라 1만1000여 금융기관이 이용하는 국제 송금·결제 시스템이다. 은행 이름과 국가명, 은행 지점명 등 정보를 담아 달러와 유로화 등 외환 거래의 신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하루 평균 4000만개 이상의 메시지가 오가면서 수조달러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때문에 ‘금융 동맥’에 비유된다.
러시아를 이 스위프트 망에서 축출하는 것은 러시아의 달러 동맥을 끊어버리겠다는 뜻이다. 스위프트 없이는 수출을 해도 대금을 받을 수 없고, 자국이 보유한 6300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스위프트 제재 발표 직후 개장된 지난 28일(현지 시각) 외환시장에서 루블화 가치는 전날보다 30% 가까이 폭락하면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우리 기업 역시 러시아로 물품을 수출하더라도 대금을 받기 어렵고, 수입을 하더라도 대금 지급이 어려워져 수출·입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당장 대금 결제 지연과 중단에 따른 기업의 손해도 커지고, 우회 결제로를 만들기 위한 추가 비용 발생도 불가피해진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對)러시아 수출액은 99억8000만달러로 전체 12위였고, 수입액은 173억5700만달러로 9위였다. 수출에서는 자동차(26억4200만달러)와 자동차부품(15억900만달러) 비율이 40% 넘고, 수입에서는 원유와 석유제품, 석탄, 천연가스 등 에너지 수입이 80%에 육박했다. 김봉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본부장은 “규제가 이어지며 전반적으로 러시아 상황이 나빠지면 수출도, 수입도 급감할 것”이라며 “크림병합 이후 우리 수출이 전년 대비 반 토막 난 것처럼 타격은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했다.
◇현지 생산, 수입도 타격 이어질 듯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가 현실화하면 러시아와 교역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러시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타격도 불가피하다. 러시아 현지 공장의 부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공장이 셧다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현대차·기아, 삼성전자, LG전자, 오리온 등이 현지 공장을 가동중 이다. 지난해 상반기 삼성전자의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33.2%로 1위다. 기아와 현대차도 지난해 각각 12.3%, 10% 점유율로 러시아 시장에서 2, 3위를 차지했다.
당장 현대차 러시아 공장은 전쟁 발발로 반도체 등 부품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서 5일까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전쟁이 3개월을 넘어 장기화하면 러시아와 CIS 등 현지 수요가 급감하면서 판로가 막힐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장상식 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은 “과거 크림반도 병합에 따른 제재 당시에도 국내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을 떠나지 않고 버텼다”며 “러시아가 동유럽과 CIS 지역 생산 기지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 수입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명예선임연구위원은 “러시아 은행들이 대거 제재를 받게 된다면 이란 핵협상 합의, 비축유 방출 등의 수단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에너지 가격 상승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에너지 수입 비중이 큰 우리로서는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