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치솟으며 120달러에 육박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 가능성으로 러시아산 원유가 글로벌 석유 시장에서 퇴출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은 유가 전망치를 하루가 다르게 올려 잡으며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56일 연속 오른 국내 휘발유 값도 넉 달 만에 L(리터)당 평균 1800원을 넘었다.
◇ 200달러 전망도 나오는 중
지난 4일(현지 시각) 북해산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배럴당 7.65달러(6.9%) 오른 118.11달러에 마감했다. 뉴욕 상품 거래소에서 WTI(서부텍사스산원유)는 7.4% 급등하며 115.68달러에 장을 마쳤다. 브렌트유는 2013년 2월 이후 9년 만에, WTI는 2008년 9월 이후 13년 반 만에 최고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석유 수요가 위축되면서 원유 선물 가격이 마이너스 가치로 거래되던 게 불과 2년 전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석유 수요가 늘고, 탄소 중립 탓에 석유 개발은 줄면서 유가는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기름 값 상승에 불을 붙였다. 러시아는 원유·석유제품을 포함한 석유 생산량에서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3위이고, 원유 수출량은 세계 2위다.
미국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금지하는 데 망설이고 있지만, 러시아 기업과 개인에 대해 각종 제재가 시행되자 세계 각국의 정유업체들은 제재 위반, 결제 부도 가능성 등을 우려해 러시아산 석유를 취급하지 않고 있다. 3월 러시아산 원유를 운반하기 위해 예약된 유조선은 지난달의 4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3일 미국 의회가 ‘러시아 에너지 수입 금지 법안’을 발의하면서 러시아산 원유 수출이 전면 중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투자은행 JP모건은 “러시아산 원유 66%가 구매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유가가 배럴당 185달러까지 치솟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헤지펀드 웨스트백은 최근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산 석유 수출 감소로 200달러 이상 폭등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정보업체 IHS마킷의 대니얼 예긴 부회장은 “1970년대 오일쇼크에 맞먹는 최악의 에너지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내 휘발유 값 1800원 돌파... “더 오른다”
6일까지 국내 휘발유 값은 56일 연속 상승하며 지난 5일엔 4개월 만에 L당 1800원을 돌파했다. 작년 11월 휘발유 값이 L당 1800원을 기록할 때 시행했던 유류세 인하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6일 오후 전국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812.9원이다. 제주도는 1900원을 넘었고, 서울도 1882원을 기록했다. 국제 유가와 국내 가격 사이에 3주가량 시차가 있는 데다 앞으로도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앞으로 휘발유 값은 더 오를 전망이다. 정부는 4월 끝나는 유류세 인하 기간을 연장하기로 하면서 인하율을 현재 20%에서 30%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유가 폭등으로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충격이 불가피해졌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은 당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7개 회원국 중 원유 의존도(GDP 1만달러 당 원유 소비량) 1위, 1인당 원유 소비량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산업구조의 석유 의존도가 높다. 국제 유가 상승에 따른 기업의 비용 상승 압력이 다른 경쟁국보다 크다는 의미여서 글로벌 가격 경쟁력 악화로 이어지게 된다. 원유를 비롯해 석유제품, 천연가스, 유연탄 등 국제 에너지 가격이 들썩이면서 물가가 동반 폭등할 것이란 우려와 함께 저성장 고물가를 뜻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형건 강원대 교수는 “코로나에서 벗어나며 세계적인 원유 수요 회복 시기에 전쟁에 따른 공급 쪽 충격이 더해졌다”며 “석유 가격 상승은 수송용뿐 아니라 플라스틱부터 의류까지 석유화학을 원료로 하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