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은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로 유가가 치솟으면서 한동안 외면받던 미국의 셰일가스·오일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셰일 오일은 2010년대 미국을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만들며 글로벌 에너지 지형도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바람과 코로나 팬데믹이 촉발한 유가 급락 속에 급속히 채산성을 잃었다. 그러나 러시아발 쇼크로 에너지 안보가 화두로 떠오르고 서방 세계가 러시아산(産) 에너지 제재에 나서면서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1년 반 만에 시추용 리그 244->650
9일 미국 유전 서비스 업체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미국에서 셰일 유정을 시추하는 리그(굴착기) 수는 지난 4일 현재 650개로 늘었다. 2020년 8월 244개와 비교하면 400개 이상 늘어난 수치다. 리그 숫자는 셰일 개발·생산을 보여주는 척도라는 점에서 불과 1년 반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셰일 혁명이 한창이던 2014년 말 1840개까지 늘었던 미국 내 리그 숫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유가가 마이너스까지 곤두박질치자 300개 수준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 이후 풍력발전량 감소로 인한 유럽 에너지 위기에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14년 만의 고유가 시대가 돌아오면서 셰일은 부활의 날개를 단 모양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파이낸셜타임스(FT)도 “유가가 오르자 채산성 문제로 버려졌던 미국 셰일 유전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정보 업체 라이스타드에너지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하루 770만배럴이었던 미국 내 주요 셰일 매장 지역의 생산량은 올 2분기 2019년과 비슷한 990만배럴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라이스타드에너지는 특히 “서방의 대러 에너지 제재에 따라 글로벌 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하루 400만배럴 감소할 경우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탄소 중립을 내세우며 셰일 업계와 껄끄러웠던 바이든 미 대통령마저 휘발유 가격이 지난 7일 갤런당 4달러를 넘어서며 폭등세를 보이자 셰일 증산을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블룸버그는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셰일 산업에 무게를 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물량 대체 수요까지 더해져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를 대체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를 검토하고 이란과 핵협상도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자국 내 셰일 확대는 예정된 순서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명예선임연구위원은 “유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자연스레 자금이 몰리며 개발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대표적인 독립계 업체인 옥시덴털은 올 들어 주가가 78% 오를 정도로 셰일 산업의 성장성은 부각되고 있다.
통상 배럴당 50~60달러에서는 수익을 내는 셰일의 특성상 지금 유가 수준은 투자가 확대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는 “미국은 1980년대 초반 아프간 침공 등으로 확대 정책을 펴던 소련을 사우디 증산을 통해 유가를 떨어뜨리며 견제했다”며 “이번엔 물량이 변수가 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셰일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천연가스 1위 업체 EQT 부사장을 지낸 박희준 EIP자산운용 대표는 “세일 유정은 한번 시추를 하면 마를 때까지 생산이 계속되는 구조”라며 “리그가 늘고 있다는 건 과거 더는 시추를 하지 않던 인근 지역까지 추가로 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다만 사태가 안정되는 하반기에는 수익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수송용 연료로서 석유 수요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변수”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