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우리나라 산업에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천연가스 수입 금지 카드를 꺼내자 러시아는 연말까지 원자재 등의 수출·수입 금지로 맞섰다. 서방 제재에 대한 반격 성격인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크고 서방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에너지·자원 분야를 중심으로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는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에너지 생산량에서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인 에너지 부국이다. 원유·천연가스 수출은 각각 세계 2위와 1위다.
여기에 석유화학 제품 원료인 나프타와 반도체 제조용 제논가스, 배터리 소재 니켈 등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부담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유·석유화학·시멘트·반도체·배터리 등 원재료의 러시아 수입 의존도가 높은 업종을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러시아가 수출 금지 품목에 농수산물까지 포함한다면 소비자 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에너지 수출 막으면 타격 불가피
지난해 대규모 흑자를 낸 정유사들은 러시아발 악재에 전전긍긍이다. 러시아산 원유 비중은 5~6%로 크지 않지만, 러시아 원유가 세계 시장에서 사라질 경우 국제 유가 추가 급등은 피할 수 없다. 한 정유사 임원은 “5월 선적분 계약을 앞두고 유가가 폭등하면서 해당 물량이 들어오는 6월 이후 설비 가동률을 낮추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며 “이미 역마진이 난 상황인데 유가가 더 오르면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화학 업계도 마찬가지다. 작년 말 t당 700달러 수준이던 나프타 가격은 러시아 금융 제재가 본격화되며 최근 1100달러를 돌파했다. 나프타는 이른바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기초 원료로 플라스틱부터 합성섬유 등 거의 모든 석유화학 제품에 쓰인다.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나프타는 러시아산이 23.4%로 1위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본부장은 “나프타는 석유화학 제품 원가의 70%를 차지하는 원료”라면서 “최근 제품 수요보다 공급이 늘어난 상황에서 가격 인상도 할 수 없어 경영에 직접적인 타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전체 석탄 사용량 중 75% 정도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시멘트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박철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중유를 쓰던 시멘트 업계는 1970년대 석유 파동 때 가장 피해가 컸던 업종 가운데 하나”라며 “러시아산 유연탄 수입까지 막히면 중소 시멘트·레미콘 업체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제조용 제논 가스도 러시아가 수출을 막을 경우 수급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제논가스는 지난해 기준 러시아(31.3%)와 우크라이나(17.8%) 양국의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3개월 치가량 각종 제조용 가스 재고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하반기까지 이어질 경우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러시아가 전 세계 생산량의 11%(3위)를 차지하는 니켈도 지난 7일 제재 우려에 역대 최고가까지 치고 오르며 국내 배터리 업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러시아가 세계 2위 수출국인 밀, 국내 시장에서 러시아산 비중이 절대적인 큰 명태 등 어류의 포함 여부는 식탁 물가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수출 경쟁력 약화하며 무역 수지 적자 우려
반도체·석유화학·석유제품·이차전지 등 러시아 금수 조치로 인한 악영향이 우려되는 품목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이다. 지난해 반도체는 1280억달러를 수출하며 1위에 올랐고, 석유화학은 551억달러로 뒤를 이었다. 석유제품(382억달러), 섬유(128억달러), 이차전지(87억달러) 등도 15대 주요 수출 품목이다.
러시아의 주요 원자재 수출 금지 조치는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한 뒤 수출하는 국내 산업 구조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전쟁 양상과는 별개로 제재 조치는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며 “작년보다 수출은 줄고, 원자재 가격 인상에 따른 수입액은 급증하면서 무역 수지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기업과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상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사태가 장기화 국면에 들어가면서 가격 급등을 넘어 수급 불안까지 예상되는 상황”이라며 “대체 수입국 확보, 원가 상승 압력 리스크 관리 등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