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 테라파워 의장./로이터

SK그룹이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세운 차세대 원전 벤처기업인 테라파워에 수백억원을 투자해 지분 10%를 인수한다. 전기차 배터리, 수소 등 청정 에너지 분야에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해온 SK그룹이 차세대 원전(原電)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SK는 최근 테라파워 측과 지분 인수 협상을 끝내고 조만간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투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도 재계 1위 릴라이언스가 보유한 테라파워 주식의 장부가치가 1540만달러(약 19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수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태원 SK회장이 지난 3월 11일 서울 을지로SK텔레콤 본사 수펙스홀에서 SK텔레콤 AI 관련 구성원들과 AI 사업을 중심으로 한 회사의 비전과 개선 과제 등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SK텔레콤 제공

SK그룹은 지분 투자와 함께 최태원 회장이 테라파워 이사회에 합류해 양측 협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현재 테라파워 이사진은 모두 7명으로 빌 게이츠가 의장, 마이크로소프트 CTO(최고기술책임자) 출신인 네이선 미어볼드 인텔렉추얼벤처스 공동창업자가 부의장을 맡고 있다. UAE 바라카 원전에서 한국 기업과 협력하는 에넥(ENEC)의 무함마드 알 하마디 사장도 이사 중 한 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의 이사회 합류는 한국 기업이 글로벌 차세대 원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상징성이 있을 것”이라며 “한국에서도 차세대 원전 사업이 확산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송윤혜

테라파워는 빌 게이츠가 3500만달러를 출자해 2006년 설립했다.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을 개발하고 있다. 테라파워는 작년 말 미국 에너지부와 40억달러(약 4조9000억원)를 투자해 와이오밍주 케머러에 345MW(메가와트)급 SMR인 ‘나트륨’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워런 버핏 소유의 전력회사도 참여하는데 2028년 완공해 60년간 가동할 예정이다.

SK의 테라파워 지분 투자는 기존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사업을 재편하려는 SK가 친환경 탄소 제로를 핵심으로 원전을 본격 육성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의 원전 기술과, 반도체에서 배터리까지를 아우르는 SK그룹 역량, 빌 게이츠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합하면 SMR 상용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이번 투자에는 SK그룹의 투자 전문 기업인 SK㈜ 외에도 그룹의 대표 에너지 전문 기업인 SK이노베이션과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으로 변신하는 SK E&S가 나서 차세대 원전과 관련한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구축할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가을 유럽을 강타한 에너지 위기에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불안이 이어지자 프랑스·영국 등 유럽을 중심으로 원전에 대한 관심은 커지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윤석열 당선인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백지화를 천명하고, 원전 산업 육성을 약속하면서 차세대 원전인 SMR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SMR은 기존 원전이 냉각재로 사용하는 물 대신 액체 금속 나트륨(소듐)을 사용한다. 액체 나트륨은 물보다 끊는 점이 높아 사고가 나도 과열될 가능성이 작다. 또 경수로에서 나온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쓸 수 있다. SMR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경제적인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으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중국·일본·프랑스·러시아 등 원전 강국들은 앞다퉈 개발 경쟁에 나서고 있다. 영국 정부는 지난해 말 2050년까지 470MW 규모의 SMR 16기를 영국 전역에 건설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한전·한수원 등 공기업 위주로 성장해온 국내 원전 산업에 4대 그룹인 SK가 진출하면서 탈원전 정책으로 침체한 국내 원전 산업이 재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원자로, 증기발생기 등 주요 설비를 제작하는 두산에너빌리티(옛 두산중공업)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 기업들은 대부분 중소 업체라는 한계가 있었다. SK그룹이 석유화학 설비 플랜트 건설 경험과 운영 능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단순 지분 투자를 넘어 차세대 원전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원전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가 다시 기대되는 시점에 대기업이 새롭게 진출한다면 산업 전체적으로 대단히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