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0대 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A사는 지난 연말부터 최근까지 재무팀 사원, 대리, 과장, 차장급 직원 6명이 줄줄이 퇴사해 사내에서 파장이 일었다. 재무팀 20명 중 무려 30%가 그만둔 것으로, 퇴사자들은 다른 대기업이나 스타트업으로 각각 옮겨갔다.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최근 벤처 투자에 공격적으로 뛰어들고 스타트업들은 IPO(기업공개)를 앞둔 곳이 많아 재무 인력 수요가 커진 것 같다”며 “한꺼번에 생긴 빈자리를 채우느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요즘 대기업에선 “인력이동이 너무 빈번해져 인사팀 업무가 폭증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직장인들 사이에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몸값 우선’ 문화가 확산되면서, 인력대이동이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명 ‘네카라쿠배’로 불리는 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이 인재들을 무섭게 빨아들이면서 인력대이동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전자 같은 국내 대표 기업 CEO들조차 “우리의 적은 네카라쿠배”라고 토로할 정도다.
◇'평생직장’보다 몸값 우선…뉴노멀 된 ‘인력대이동’
삼성전자는 최근 사내 각 부문장들에게 ‘5월 초까지 갑자기 연차를 내는 5년 차 미만 인력들은 SK하이닉스 면접에 참석할 확률이 높으니 관심 있게 챙겨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가 ‘주니어 탤런트’ 전형을 하면서 다음 달 초까지 면접을 진행할 예정인데, 저연차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국내 최고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몸값을 올려주면 주저없이 이직을 한다. 국내 제조 대기업 B사의 1년 차 과장은 최근 SK계열 배터리 기업 SK온으로 이직했다. 그는 회사를 옮기면서 연봉을 30% 이상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요즘 2030세대 직원들은 직장인 익명게시판이나 단톡방을 통해 다른 회사의 연봉·복지제도도 꿰뚫고 있으며, 조건이 더 좋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취업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최근 남녀 직장인 9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직장인 32.4%가 “상반기 내 이직을 위해 현재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 중”이라고 답했고, 57.7%는 “수시로 채용공고를 살피며 기회를 보고 있다”고 했다. 90% 이상이 이직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신사업 관련 경력채용 봇물…헤드헌팅업체도 호황
최근 주요 대기업들이 신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도 ‘인력대이동’을 부추기고 있다. 삼성·현대차·SK·LG 같은 주요 대기업들이 바이오·수소·로봇·AI(인공지능) 등 새로운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다 보니 새로운 인력에 대한 수요가 커지는 것이다.
배터리 소재 회사인 대기업 C사는 요즘 인재를 공격적으로 영입하는 것으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지난해 100명을 새로 뽑았는데, 그중 53%가 경력직이다.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배터리 소재 사업은 빠른 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실무 경험이 있거나 업계에서 검증된 경력자를 채용해 즉시 활용해야 한다”며 “올해 경력직 채용 비중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또 주요 대기업들이 공채를 속속 폐지하고, 미국·유럽처럼 수시채용·경력채용으로 전환하는 것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인력 이동이 빈번하게 이뤄지면서 헤드헌팅업체들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헤드헌팅회사인 유니코써치의 경우 지난 연말 채용 컨설턴트 10명을 새로 뽑아 전체 인력이 70명에서 80명으로 늘었다. 이 회사 김혜양 대표는 “지난해 초만 해도 경력 직원을 찾아달라는 문의가 1주일에 100건 정도였는데, 최근엔 150건으로 폭증했다”며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직원을 더 뽑았다”고 말했다. 임원급 인력 헤드헌팅업체 패스파인더 김재호 대표도 “코로나 사태 이후 사업의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주요 대기업들마다 새로운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해 기존 사업영역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활동했던 임원들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