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은 지난해 연간 5조8601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 적자를 냈다. 그런데 13일 한전이 발표한 1분기 영업적자 7조7869억원은 그 기록을 단 한 분기 만에 넘어서는 충격적인 결과다. 천문학적인 적자에 직면한 한전은 상장 자회사 지분과 부동산 매각을 포함한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고 전면적인 긴축 경영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자구 노력만으로는 지난 정권의 탈원전이 낳은 고비용 전력 생산 구조를 딛고 대규모 적자를 만회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상보다 2조 많은 적자… 어닝 쇼크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각 증권사들이 전망한 한전의 1분기 영업적자 예상치는 평균 5조7289억원이었다. 하지만 13일 한전은 그보다 무려 2조원 이상 많은 적자를 발표했다. 각종 통계와 예측 기법 등을 활용하는 증권사의 기업 실적 전망치가 이처럼 큰 차이로 틀린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전력 업계 한 관계자는 “그만큼 한전의 1분기 실적이 충격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분기 배럴당 50~60달러 수준이던 국제 유가는 올 2월 90달러를 넘어섰고, 3월 이후 지금까지 100달러 위에서 고공 행진하고 있다. 한전이 발전 회사로부터 전기를 사들일 때 기준이 되는 계통한계가격(SMP)도 지난해 1분기 kWh(킬로와트시)당 77원에서 181원으로 2배 넘게 급등했다. 1분기 한전이 공장·가정 등에 판매하는 전기요금 단가가 110원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원가의 반값 세일에 나선 것이다. 전기요금은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으로 향하자 전기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4.5% 증가한 것도 적자를 심화시켰다. 한전이 올 들어 문재인 정부의 정책 기조와 달리 원전과 석탄발전 구입 비중은 늘리고, LNG는 다소 줄였지만 급등한 에너지 가격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탈원전에 매달리며 발전 단가가 훨씬 비싼 LNG 의존도를 높인 문재인 정부의 실책이 원흉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예정보다 3년 앞당겨 가동이 중지된 월성 1호기, 각종 명목의 안전 검사에 발목을 잡혀 지난 정부 5년 내내 멈춰 있었던 한빛 4호기 등 원전들의 자리는 값비싼 LNG발전소들이 대신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천연가스 수출 세계 1위, 원유 수출 세계 2위인 러시아가 서방세계의 제재로 에너지 시장에서 사라지자 한전이 그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한전, 자구책 나서지만 역부족일 듯…요금 인상 불가피 관측
최악의 상황에 접한 한전은 한전기술 등 상장 자회사의 지분 매각을 추진하고, 매각 가능한 부동산은 모두 팔겠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내놨다. 아직 남아있는 해외 석탄발전 사업도 정리하고, 비용 절감, 투자 사업 시기도 조정하겠다고 했다.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오는 20일 규칙개정위원회를 열고 민간발전업체에 지급하는 전력거래대금 항목 중 환경기여도 요금을 없애 감액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자구 노력으로 사상 초유의 적자를 만회하기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 항목 폐지에 따른 한전의 비용 절감 효과는 연간 1000억원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계에 이른 한전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선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올해 한전이 발행하는 회사채 규모는 지난해까지 누계액과 맞먹는 40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80조원은 연간 이자만 2조원을 웃도는 규모다. 국제 에너지 가격 강세에 최근 원·달러 환율까지 급등하며 올해 적자 규모는 예상했던 30조원을 넘어 40조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공기업인 한전의 재무 구조 악화는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한전의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며 국가 신인도까지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의 물가 상승세를 고려하면 단숨에 큰 폭의 인상도 힘든 상황이다. 인수위 경제 2분과 전문위원을 지낸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전기요금을 꾸준히 올려온 해외 각국도 소매요금 인상에 급격한 연료비 상승분을 다 반영하지는 않았다”며 “물가 충격을 감안해 점진적으로 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