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긴축 등의 영향으로 세계 증시가 폭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글로벌 오일·가스업체들의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1970~1980년대 석유파동보다 심한 에너지 위기가 닥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이런 악재가 오히려 오일 메이저들엔 대박을 터뜨릴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로 대표되는 친환경 정책으로 새로운 유정 개발이 급감한 것도 오일 메이저의 이익을 높이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빅오일(거대 석유회사) 기업들을 ‘FAANG(페이스북·애플·아마존·넷플릭스·구글)’으로 불리며 과거 세계 증시를 견인한 빅테크 기업에 빗대 ‘뉴 FAA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드는 국제 유가가 15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만큼 오일 메이저 주가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 폭등을 방관하며 큰 수익을 거두고 있는 오일 메이저 기업이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꼽히면서 규제 리스크도 제기된다. 지난주 41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 수치를 받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글로벌 오일 메이저인) 엑손이 지난해 하느님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고 비판했다.

◇빅테크에서 빅오일로… 사상 최고가도 속출

13일 시가총액 분석 사이트 컴퍼니스마켓캡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회사인 사우디아람코 시가총액은 2조3690억달러(약 3047조원)를 기록하며 애플을 제치고 글로벌 증시 시총 1위 자리를 재탈환했다. 아람코는 2019년 12월 IPO(기업 공개)와 함께 세계 시총 1위에 오른 뒤 코로나 비대면 특수가 한창이었던 2020년 8월 애플에 밀렸다가 지난달부터 시총 1위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2년 전 주가 급락과 산업구조 변화로 92년 만에 다우존스 지수 30개 종목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은 미국 석유 회사 엑손모빌 주가는 최근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올해 주가는 60% 이상 급등했다. 시가총액도 4233억달러까지 불어나며 글로벌 시총 순위에서 빅테크 기업인 엔비디아(14위·4230억달러)를 제치고 13위까지 올랐다.

미국 셰브론과 코노코필립스도 올 들어 주가가 50% 이상 급등하며 사상 최고가로 치솟았다. 셰브론은 작년 말 시총이 2262억달러로 당시엔 삼성전자(4556억달러)의 절반에 그쳤지만, 지금은 삼성전자보다 100억달러 커졌다. 유럽 최대 석유 회사인 영국 셸은 올 들어 주가가 140% 급등했고, 코로나 충격에 1993년 이후 최저가로 떨어졌던 BP 주가도 올해 20% 이상 올랐다.

◇위기에 다시 부각되는 화석연료

올 들어 20% 가까이 급락한 미국 우량 대기업의 S&P 500 지수와 달리 S&P 에너지 지수는 24%가량 상승했다. 주가 상승의 가장 큰 요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하며 꺾이지 않는 국제 유가 상승세가 꼽힌다.

여기에 역설적으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증시에서 오일·가스 주식의 디스카운트 요소였던 친환경 기조까지 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친환경 바람이 확산하며 정유사들이 화석연료 설비를 증설하지 않기로 하자 휘발유·경유 등 제품 가격 상승세가 꺾이지 않고, 이는 정유사 실적을 개선하고 주가 상승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마이크 워스 셰브론 CEO는 이달 초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휘발유 가격이 더 올라도 미국에 새 정제 시설은 추가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규 투자를 대폭 줄인 오일 기업들이 늘어난 수익을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에 사용하면서 오일 주식이 투자자에게 더 인기를 끄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FT(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셸은 올 상반기 총 85억달러 규모로 자사주 매입에 나섰다. 게다가 글로벌 증시 폭락장에서 오일 메이저 주가가 오르자 ‘나쁜 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했던 블랙록 등 세계 주요 자산운용사들도 오일·가스 기업 주식 매입에 나섰다. FT는 “전통적으로 오일 메이저 주주들은 배당금 수익을 기대하는 연금 생활자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선 젊은 투자자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혜택을 본 석유·가스 기업에 세금을 더 부과하겠다는 ‘횡재세(windfall tax)’ 논의가 나오고 있지만, 오일 기업 주식 상승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김형건 강원대 교수는 “유가와 정제 마진 상승세가 아직 주가에 다 반영되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며 “수요가 크게 떨어지지 않는 한 주가가 더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