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유럽 주요 국가를 출장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현지 법인장들로부터 “당분간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사업 전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B2B(기업 간 거래)는요?”라고 반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안팎에서는 이 같은 발언은 스마트폰·TV 등 B2C 사업뿐 아니라 반도체 같은 B2B 사업조차 안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하반기 전략회의를 준비 중인 국내 주요 기업 경영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둡다. 올 초만 해도 코로나 팬데믹 종식 이후의 신성장 동력 발굴, 새로운 투자, M&A(인수합병) 등이 주요 안건으로 거론돼 왔으나, 최근 국내외 경제 상황이 급변하면서 ‘위기대응회의’ ‘비상경영회의’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신성장 동력 발굴하려던 하반기 전략회의가 복합위기 대응회의로
이 부회장은 16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주요 현지 법인장들과 회의를 갖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후폭풍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원자재 가격 폭등에 대응하는 경영 전략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요 사업장도 방문해 현장 상황을 점검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귀국한 직후인 다음 주부터 2년 만에 하반기 전략회의를 연다. 코로나 사태로 연말에만 한 차례 진행했지만, 올해부터는 상반기 회의도 다시 열기로 한 것이다. 전 세계 법인장들도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각오를 다질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복합 위기 속에서 생존하는 전략 수립으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삼성은 이번 회의에서 공급망 위기와 운송비·원가 상승,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우려 등 글로벌 경영 현황을 점검하고 사업 계획을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SK그룹은 17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상반기 최대 전략회의인 ‘2022 확대경영회의’를 열 계획이다.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 30여 명이 참석해 계열사별 파이낸셜 스토리를 점검하는 것이다. 파이낸셜 스토리는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하는 것. 하지만 최근 국내외 증시가 동반 폭락세를 보이고 있어,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들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 고위 임원은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주가 폭락은 일시적이었지만 지금은 산업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라서 주가 하락세가 연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 역시 다음 달 한국에서 글로벌 권역본부장 회의를 열어 권역별 전략과 글로벌 전체 전략을 다시 점검한다. 현대차는 지난 4월 대내외 위기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전략·기획·구매·개발 등 핵심 부서 담당자가 참여하는 통합 리스크관리 업무협의팀(CFT)을 만들기도 했다.
LG그룹도 3년 만에 상반기 전략보고회의를 열고 있다. 구광모 회장 주재로 지난달 30일부터 LG전자 HE(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를 시작으로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가 차례로 회의를 열고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원자재 폭등과 금리 인상 같은 대외 불확실성이 중첩되면서, 주요 경영진은 현재 경제 상황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주요 대기업 실적 전망치도 줄줄이 하향 조정
이 같은 기업들의 우려는 숫자로도 나타나고 있다. 본지가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 3곳 이상의 전망치가 나온 곳 대상)를 조사한 결과, 올 1월 대비 영업이익 전망치가 하락한 상장사는 총 89사 중 51사(57.3%)에 달했다.
특히 석유화학 업종은 고유가로 인한 원가 부담과 경기 둔화에 따른 수요 부진이 겹쳐 하락세가 뚜렷했다. 롯데케미칼의 올해 영업이익 전망치는 1조5453억원에서 63.8% 감소한 5600억원으로 낮아졌다. LG화학과 금호석유도 올 1월 전망치보다 각각 18%, 17%씩 떨어졌다. 선박 제조 원가에 있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후판값이 3년 연속 인상된 조선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포스트 코로나 수혜주로 꼽혔던 호텔신라·이마트·롯데쇼핑·GS리테일 등 주요 내수 기업들도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가 5개월 만에 10% 이상씩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