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일은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입니다.”

11박12일 유럽 출장을 마치고 18일 귀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출장 소감을 묻는 취재진 질문에 작심한 듯 발언을 쏟아냈다. 이 부회장은 “한국에선 못 느꼈는데 유럽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훨씬 더 느껴졌다. 시장 혼돈과 변화, 불확실성이 많은데 우리가 할 일은 좋은 사람 모셔오고, 조직이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뒤, 기술력의 중요성을 강하게 언급했다. 그는 또 “몸은 피곤했지만 헝가리 배터리 공장도 갔고, 고객사인 BMW도 만났고 인수한 전장(電裝·자동차 전기장치 부품)회사 하만 카돈도 갔다”며 이례적으로 출장 행선지를 상세하게 밝혔다. 그동안 숱한 질문 공세에도 “수고 많으십니다” 한마디가 다였던 평소 해외 출장 귀국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재계에서는 반년 만에 떠난 해외 출장길에서 반도체, 배터리, 전장 등 삼성 핵심 사업의 현지 상황을 점검한 이 부회장이 글로벌 기술 변화 트렌드에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기술을 세 차례나 언급한 것은 삼성만의 차별화된 기술력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앞으로 핵심 기술 확보와 인재 영입에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기술”

이 부회장은 이번 유럽 출장에서 삼성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먼저 챙겼다. 그는 이날 귀국길에서도 “제일 중요했던 것은 네덜란드 ASML과 벨기에 반도체연구소(IMEC)에서 차세대, 차차세대 반도체 기술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ASML은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의 초미세 반도체 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는 업체다. 특히 ASML이 생산하는 차세대 EUV 노광장비 ‘하이 뉴메리컬 어퍼처(NA) EUV’는 올해 초 인텔에 이어 최근 TSMC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도 ASML에서 이 장비를 직접 확인한 것으로 알려져, 삼성전자의 도입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부회장은 ASML 방문에 앞서 삼성SDI 헝가리 공장을 찾았다. 이 부회장은 또 삼성SDI의 핵심 고객사인 BMW 경영진과 만났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자동차업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BMW가 차세대 전기차에 중국 CATL의 배터리를 채택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삼성SDI 주가가 크게 출렁였다. 이 부회장이 올리버 집세 BMW 회장을 만난 것은 시장 우려를 불식시키고 협력 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LG에너지솔루션·SK온에 비해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그룹 차원의 투자와 지원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SDI가 앞으로 달라진 경영전략을 보여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기술력을 거듭 강조한 만큼 삼성SDI는 차세대 배터리로 꼽히는 ‘전고체 배터리’ 연구개발(R&D)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인플레이션·시장 위축 심각…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현지 법인장 회의

이 부회장은 귀국 직전인 지난 16일 현지 법인장회의를 주재하며, 삼성전자의 주요 시장인 유럽이 많이 위축돼 있고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의는 애초 오후 6시 끝날 예정이었지만,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밤 9시를 넘길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은 삼성전자 스마트폰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주요 시장이지만, 올 1분기 삼성전자 스마트폰 출하량은 16% 감소했다. 반면 2위 애플은 6% 하락에 그쳤다. TV·가전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부회장 귀국 직후인 오는 21일부터 삼성전자는 전 세계 해외법인장이 한자리에 모여 글로벌 전략회의를 갖는다. 삼성전자 경영진이 수요 위축과 원자재가 상승 등 글로벌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