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에 이어 배터리까지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미국은 2024년부터 중국이 아닌 나라에서 배터리 소재와 부품을 조달해야 전기차 보조금(대당 최대 7500달러)을 지급하기로 했다. 중국이 70~80%를 장악한 배터리 공급망에서 벗어나 독자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의미다. 세계 완성차 기업들뿐 아니라 배터리·소재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미국 상원은 7일(현지 시각) 에너지 전환의 핵심인 배터리에서 보조금 정책을 통해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 구축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완성차 업계는 미국 인플레 감축에 담긴 탈(脫)중국 배터리 소재 조달이 비현실적이라고 난감해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주도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기후변화 대응에 3690억 달러(약 482조원)를 투입한다. 특히 전기차 대중화를 위해 보조금을 확대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업체별로 연간 20만대까지만 보조금을 지급하던 한도를 없앤 것이다. 하지만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배터리에 중국에서 채굴·가공된 소재·부품이 일정 비율 이하여야 한다는 강력한 조건을 달았다.
구체적으로 먼저 전기차 보조금 7500달러의 절반을 받으려면 배터리의 핵심 자재(리튬·니켈·코발트 등)를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이 비율은 2024년 40%부터 시작해 2026년에는 80%까지 늘어난다. 또 나머지 절반의 보조금은 북미에서 제조되는 배터리의 주요 부품(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받을 수 있다. 이 비율은 2028년 100%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내년부터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미국 자동차 시장을 선점해야 하는 완성차·배터리 업계는 소재·부품 공급망 구조를 전면 재조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GM·포드·현대차·도요타 등을 대표하는 미국 자동차혁신연합 존 보젤라 대표는 “이 기준대로 하면 현재 미국 내 72개 전기차 모델 중 70%는 보조금에서 탈락한다”며 “그 어떤 전기차도 완전한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동차 업계가 미 중서부·동남부를 중심으로 광물 조달을 위한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이건 하룻밤 사이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현대차는 전기차 최종 조립을 북미에서 해야 하는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연내 GV70 전동화 모델을, 2024년 EV9을 현지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오닉5와 EV6의 현지 생산 계획은 아직 수립되지 않고 있다. 특히 국내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모델의 해외 생산을 위해서는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 현대차가 추진 중인 미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은 2025년은 돼야 완공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현대차는 당분간 미국에서 주요 모델 보조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중국산 광물·소재에 의존하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특히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를 구성하는 전구체(니켈·코발트·망간 혼합물)와 양극활물질(전구체에 리튬을 결합한 것)의 95%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중국 화유코발트·GEM 같은 업체들이 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양극재 내재화를 위해 중국 회사들과 합작사를 설립하는 것이 현실이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는 “미국이 이런 내용까지 실질적으로 들여다볼 경우, 한국 배터리 업계엔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며 “한국이 ‘칩4 동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배터리·전기차 분야에 더 까다로운 잣대로 압박하는 ‘패키지 딜’을 꾀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은 에너지 공급망도 재편에 나서고 있다. 태양광·풍력발전에도 보조금을 적용해 신재생에너지 독자 기반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