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부에서 탈원전을 주도하던 에너지 분야 핵심 공기업 사장들이 임기가 끝나고도 자리를 보전하고 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표적 탈원전 인사들이 ‘탈원전 폐기’를 전면에 내건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이 되도록 버티고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윤석열 정부가 망가진 원전 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해 대규모 투자 등을 약속했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 교체에 따른 실질적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기 끝나고도 4개월, 1개월 더 재임 중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과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은 9일 현재 당초 임기를 각각 4개월, 1개월 넘겨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8년 4월 취임한 정 사장은 지난해 3년 임기를 마친 뒤 연임 형식으로 추가된 1년 임기도 지난 4월 4일 끝났다.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을 거쳐 2019년 7월 가스공사로 부임한 채 사장은 지난달 8일 임기를 마쳤다. 각각 4년, 3년이라는 법적으로 보장된 임기를 끝냈지만, 여전히 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정 사장은 3월 대선을 앞두고 재연임을 시도하다 회사 안팎의 비판 여론에 밀려 임기를 더 늘리지 못했다. 하지만 후임 사장 선임 절차가 지연되면서 4개월 넘게 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 사장은 임기가 마무리된 뒤인 지난 6월엔 일부 간부를 대상으로 ‘특별 승진’ 인사를 하려다 ‘알박기’ 논란이 일자 포기하기도 했다. 채 사장 또한 신임 사장 선임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여전히 가스공사 사장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정 사장과 채 사장은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였던 탈원전을 수행한 핵심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함께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 중이다. 채 사장은 청와대 비서관 재직 당시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관련해 직권 남용과 업무 방해를 했다는 혐의로 재판 중이고, 정 사장은 백 전 장관 등의 지시에 따라 평가를 조작하고 이를 이사회에 제출, 의결을 이끌어내 한수원에 1481억원 손해를 입힌 배임, 업무 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한 원전 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탈원전에 앞장섰던 한수원 사장이 새 정부 산업부 장관과 함께 해외에서 원전 세일즈를 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하다”고 했다. 경남 지역 한 원전 업체 대표는 “원전 분야 투자를 늘린다며 간담회는 많아졌는데 주변에서 새로 수주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며 “탈원전 폐기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채 사장은 민간 기업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비싼 가격에 LNG를 수입해오면서, 인플레 극복에 역행하고 있다는 거센 비판도 받고 있다.

◇”물러나는 게 순리” 목소리 커

정 사장과 채 사장은 중앙 부처 1급을 비롯해 공공기관장 인선이 늦어지는 난맥상 속에서 법규를 방패 삼아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기소 중이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53조에 있는 ‘형사사건으로 기소 중인 경우 의원면직을 허용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내용이 그 근거다. 후임 사장이 올 때까지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마음대로 자진 사퇴할 수도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관련 조항은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는 가운데 명예 퇴직을 신청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이미 임기가 끝난 경우에 해당 조항 때문에 스스로 물러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지난 정부가 ‘헛발질’한 에너지 정책을 바로잡으려면 에너지 공기업 사장 인사에 정부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한수원 사장 후보 가운데 일부는 정 사장과 가까워 퇴임 후에도 정 사장의 영향력이 클 것이란 소문이 있다”며 “가스공사도 내부 출신들로 후보가 채워진 것으로 알려져 개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