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 주요 대기업 CEO(최고경영자)들은 해외 사업과 관련 있는 국가의 대통령·총리 등에게 미팅 제안서를 제출해놓고, 그들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5분 대기조’ 상태다. 5대 그룹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는 “해외 정상이 언제 보자고 연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말에도 개인 일정을 거의 잡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CR담당 이인용 사장이 19일(현지시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주제 라모스 오르타 대통령을 접견해 삼성전자 활동을 소개하는 한편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 /삼성전자 제공

이들이 각국 정상이나 주요 장관을 만나려 애를 태우는 것은 사업 관련성보다는 ‘2030 부산엑스포’ 유치 때문이다. 2030 엑스포 개최지는 내년 11월 BIE(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170국 회원사 비밀투표로 결정되는데, 여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각국 주요 인사를 만나 “앞으로 우리가 투자를 많이 하겠다. 대신 부산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에 참여한 국내 주요 그룹들은 투표권을 가진 BIE 회원국을 대상으로 아예 담당 국가를 나눴다. 삼성은 네팔·라오스·남아공·레소토 등 31국, SK는 아프가니스탄·아르메니아·몰타 등 24국, 현대차는 페루·칠레·바하마·그리스 등 20국, LG는 케냐·소말리아·르완다 등 10국을 맡았다. 기존에 진행한 투자, 앞으로의 미래 협력 등을 중심으로 총 12개 그룹과 111개 회원 국가를 짝지어 ‘전담 기업’으로 정한 것이다. 미국·중국·일본·인도네시아처럼 그룹별로 사업 연관성이 많은 국가는 여러 기업이 공동 담당하기로 했다. 기업들은 앞으로 전담 국가를 늘릴 예정이다.

재계 대표 인사들은 지구촌 곳곳을 뛰고 있다. 지난 18일 박정호 SK텔레콤 부회장과 유영상 사장은 태평양의 섬나라 팔라우에서 수랑겔 휩스 주니어 대통령을 만나 부산엑스포 지지를 요청하고 팔라우의 통신 인프라 고도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전자는 주요 사장단이 총동원됐다. 최근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은 스웨덴·남아프리카공화국·레소토, CR(대외 협력) 담당 이인용 사장은 동티모르, 생활가전담당 이재승 사장은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중남미 3국, 휴대전화 사업 담당 노태문 사장은 파나마를 각각 방문해 부산엑스포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

박정호 SKT 부회장(왼쪽)이 지난 18일 수랑겔 휩스 주니어 팔라우 대통령(가운데)을 만나 '2030부산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한 지지를 요청한 후 유영상 SKT CEO(오른쪽)와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다. /SKT 제공

부산엑스포 공동 유치위원장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의 회장)은 오는 11월 말 파리에서 열릴 3차 프레젠테이션에 직접 발표자로 나서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최 회장은 친분이 두터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회장에게 ‘동계 올림픽과 여수엑스포를 유치한 그룹 노하우를 백분 활용해 부산엑스포를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전자뿐 아니라 다른 주요 계열사 CEO도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최근 삼성전기 장덕현 사장은 필리핀 산업부 장관을, 삼성 SDI 최윤호 사장은 헝가리 외교부 장관을 만나 부산엑스포 유치 활동을 벌였다.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는 최근 복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부산엑스포 대통령 특사’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매일 부산엑스포 유치 관련 진행 사항을 보고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지난 3월 인도네시아 공장 준공식에서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 부산엑스포 지지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에 브라질,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파라과이, 콜롬비아를 포함한 중남미 10국 장차관 등 고위 인사를 초청해 부산의 장점을 강조했다.

재계가 발 벗고 뛰고 있지만, 현재 유치전은 막강한 오일머니를 내세운 사우디아라비아에 뒤지고 있는 상황이다. 부산을 지지한 국가는 10여 국이지만, 사우디 리야드를 지지한 곳은 50국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동민 부산엑스포 민간위원회 사무국장은 “우리가 사우디보다 1년 정도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지금은 열세지만 한국 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강력한 문화 콘텐츠의 힘을 적극 활용하면 충분히 역전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