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경기도 평택 세코닉스 2공장에서 만난 박은경 대표는 인터뷰 직전까지 작업복 차림으로 업무 지시를 내린 후에야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그는 “오너 딸이라 대표가 됐다는 꼬리표가 싫어 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지난달 21일 경기 평택시 세코닉스 2공장에서 만난 박은경(50) 세코닉스 대표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작업복 차림이었다. 박 대표는 이날로 예정된 미국 전기차 업체의 공정 실사를 앞두고, 실사장인 사내 전시장에서 어떤 부품을 보여줄지 임직원들과 하나하나 확인하고 난 뒤에야 인터뷰에 응했다.

세코닉스는 스마트폰 카메라 렌즈와 자동차 카메라 렌즈·모듈 등을 만드는 광학 부품 전문 기업이다. 삼성 스마트폰과 갤럭시 워치, 현대차 카메라, LED TV 같은 다양한 제품에 이 회사 부품이 들어간다. 박 대표는 대우전자 연구소장 출신으로 회사를 세운 부친 박원희 회장에 이은 2세 경영자이며, 자동차 부품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CEO다. 그는 “예전엔 자동차 부품 공급 업체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남성 기업인으로부터 ‘엄마가 애를 봐야지…' 하는 얘기도 들었다”며 웃었다. 박 대표는 “오너 딸이라 대표가 됐다는 말을 듣기 싫어 기술을 악착같이 공부했다. 이제는 ‘엔지니어 출신이냐’는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IR 담당으로 시작 “세상 욕이란 욕은 그때 다 들었다”

박 대표는 세코닉스에 입사한 지 올해로 꼭 20년 됐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 입사했다가 “회사 홍보를 도와달라”는 부친의 요청을 받고 2002년 입사했다. 박 대표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져 망설였지만 몇 년만 현장에서 배우자고 생각한 게 지금까지 왔다”고 했다.

그가 입사한 당시 회사는 코스닥 상장 2년 차로, 프로젝션 TV에 들어가는 카메라를 개발·양산하면서 본격적인 성장세에 접어든 시기였다. 2001~2002년 삼성전자의 개발 의뢰를 받고 핸드폰용 카메라 렌즈도 개발했다. 박 대표가 처음 맡은 역할은 IR(투자 유치) 담당이었다. 하지만 당시 3만원대였던 주가가 1만원대까지 하락하면서 주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박 대표는 “세상 욕이란 욕은 그때 다 들었다”며 “회사의 핵심 기술과 경영 현황을 정확히 꿰고 기업 비전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제대로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온라인으로 경영대학원 수업을 듣고 회사 연구소를 직접 찾아 기술을 공부했다.

2005년에는 결혼해 자녀 둘을 뒀지만,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독한 워킹맘으로 살았다. 박 대표는 지금도 오후 9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그는 “부친의 요청으로 입사했지만, 내가 회사를 대표한다는 생각에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악착같이 버텼다”고 했다.

◇”’오너 딸’ 꼬리표 싫어 밤낮없이 공부”

지독하게 업무에 매달리며 내공을 쌓은 덕분에 그는 2014년부터 회사 경영 전반을 맡았고, 2016년에는 부친으로부터 대표직을 이어받았다. 2015년 평택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을 땐 전 직원과 함께 쓸 수 있는 장비, 자재를 끌어내고 열흘 만에 배전 작업을 마쳐 공장을 재가동했다. 2018년 폴란드에서 부품 공급 차질이 빚어지자 두 달간 현지에 머무르며 직접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폴란드 해외 법인 설립, 미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와의 협업을 포함한 굵직한 신사업도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엔비디아와는 자율주행 차량용 반도체에 필요한 카메라 모듈을 개발하고 있다. 그가 대표에 취임하기 전인 2015년 2448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4427억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됐다.

박 대표는 “4차 산업의 핵심인 AI(인공지능)의 학습을 위해 사진 자료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 과정에서 결국 고성능 카메라 렌즈와 모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기술 수요도 해결할 수 있는 기술 경쟁력을 갖춰 매출 5000억원 시대를 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