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무역 적자 95억달러(약 13조원)는 역대 최대 무역 적자를 냈던 1996년 한 해 적자 206억달러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규모다. 액수도 충격적이지만 환율이 치솟는 상황에서도 수출이 둔화하면서 적자가 5개월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환율이 우리 수출을 늘리며 무역수지 개선에 기여했던 과거 IMF 외환 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며 수요가 쪼그라드는 데다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물 경제 위기…”대중 무역 변곡점 맞아”
전례 없는 무역 적자 행진을 두고, ‘코로나로 인한 공급망 붕괴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충격파가 더해지면서 무역 의존도가 커 외부 변수에 취약한 우리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LNG(액화천연가스)·석유·석탄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며 수입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수출길마저 막히자 무역수지 적자 기조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달 원유·가스·석탄 3대 에너지원의 수입액은 185억2000만달러로 지난해 8월(96억6000만달러)의 두 배에 달했다. 에너지 수입 증가액이 지난달 무역 적자의 90%와 맞먹는 수준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작년 수준을 유지했다면 적자 규모가 미미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북반구가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에너지 가격마저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수입 부담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연초 MMBtu(열량 단위)당 30달러 선이던 JKM(동북아 LNG 가격 지표) 가격이 지난주 70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연내 1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고 전했다. 조상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금융 부문에서 촉발됐던 과거 위기와 달리 이번 위기는 지정학적 문제에서 시작해 에너지, 곡물, 공급망 등 실물 경제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수출도 불안감을 키운다. 상승세가 둔화되고 있는 데다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에서 4개월째 적자가 이어지면서 우리 무역 구조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교수는 “중국에서 벌어 대(對)일본 적자를 메우고, 미국에 팔아 흑자를 남기는 게 우리 무역 흑자 구조”라며 “중국에서 흑자를 못 내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 수입을 옥죄면서 과거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한 뒤 완제품으로 만들어 미국 시장으로 팔던 국제 분업 구조가 깨진 데다 중국의 제조 경쟁력이 강해지면서 한국산이 설 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상현 원장은 “중국에서 원자재나 범용 반도체 수입은 계속 늘어나지만 우리 제품 수출은 줄고 있다”며 “대중 무역이 변곡점을 맞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중국과 교역에서 반도체와 무선통신 기기 수출은 각각 3.4%, 14.1% 줄었지만, 수입은 16.3%, 3.8% 늘었다.
글로벌 경기가 동시에 위축되면서 수출 비중이 큰 우리나라로서는 활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진단도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대중 수출이 줄고, 적자가 이어진다는 것은 우리 수출이 안되고 있다는 뜻”이라며 “1~2년 안에 아세안이나 미국 등 새 시장을 확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정책 역량 수출에 집중해야”
전 세계가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돈을 대거 풀었다가 거둬들이는 국면에서 복합 위기를 맞다 보니 각국 정부가 수요를 진작할 수단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아직 침체는 초기인데 당국이 수요를 확대할 정책 수단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며 “과거 IMF나 금융 위기 때와 비교해 지금이 훨씬 상황이 안 좋다”고 진단했다.
전날 정부가 관계 부처 합동으로 9~12월 수출 전략 방안을 내놨지만 이를 뛰어넘는 특단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정식 교수는 “무역 적자가 더 커져서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금융시장이 요동칠 수 있다”며 “지금은 정책 역량을 인플레이션이나 구조 개혁보다는 수출에 맞춰서 당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