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은 제주 KAL호텔을 950억원에 부동산 개발 회사에 최근 매각했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이 소유한 왕산레저개발, 제주 토평동의 파라다이스호텔 부지, 미국 월셔그랜드센터 지분도 매각해 1조원가량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다. SK그룹 계열사들도 잇따라 비주력 자산을 정리하고 있다. SK텔레시스는 지난 6월 경기 성남 판교연구소를 의약품 제조사 제테마에 팔아 820억원을 마련했고 SK스퀘어는 7월 바이오 기업 나노엔텍 지분 760만주를 한 국내 사모펀드에 580억원에 넘겼다.

기업들이 부동산이나 보유 지분을 팔아 현금 확보에 나서고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긴축 우려가 커지고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라 금융 비용이 증가하자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것이다. 기업들이 향후 경제 상황을 그만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기업들과 글로벌 큰손으로 불리는 투자 그룹도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팔고 줄여라, 몸집 줄이는 기업·큰 손들

미국 전기차 업체 니콜라는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4억달러(약 5518억원) 규모 신주를 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전기차 업체 루시드도 3년간 80억달러(약 11조원) 신주 발행을 위한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신주를 발행하면 유통 주식량이 증가하며 주식 가치가 하락한다. 주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들은 “공급망 위기에 따른 부품난을 타개하고 비용 상승에 대비하겠다”며 현금 확보를 선택했다.

투자 업계 큰손들도 보유 지분 정리에 나서며 투자 목록을 재정비하고 있다.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 마사요시)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는 지난달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 지분을 처분해 340억달러(약 44조원)의 현금을 확보했다. 소프트뱅크가 올해 4∼6월 분기 기준 역대 최대인 3조1600억엔(약 30조4000억원)의 손실을 내자 현금 확보에 나선 것이다. 한국 ‘서학개미’ 사이에서도 유명한 스타펀드 매니저 캐시 우드가 운용하는 아크인베스트먼트도 테슬라 지분 15만주를 정리했다.

대규모 투자 계획을 추진해오던 기업들도 신중한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6월 2조원이 투입되는 미국 배터리 공장 투자 계획을 전면 재검토한다고 밝혔다. 반도체 테스트 기업인 두산테스나는 최근 시스템 반도체 후공정 업체 엔지온 인수전에 나섰다가 철수했다. 배터리 기업 SK온도 글로벌 사모펀드 등으로부터 4조원 투자 유치 계획을 세웠지만 투자자들이 잇따라 난색을 표하면서 애를 먹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 사모펀드 등이 현금을 비축하며 보수적 자금 운용으로 돌아선 상황”이라며 “소비 심리 위축에 따라 투자도 더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회사채, 차환 대신 상환

기업들은 지갑을 닫으며 빚도 줄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26일 만기가 돌아온 14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현금으로 상환했다. 금리가 높아 조달 비용이 오르자 차환(借換)하지 않고 갚아버린 것이다. HL만도도 지난달 29일이 만기인 900억원 회사채를 전액 상환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4000억원의 회사채를 순발행했지만 올해는 발행보다 상환액이 많다. 반면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과 단기 금융상품 자산이 23조원을 넘으며 지난해 말보다 27% 넘게 늘어났다.

회사채를 통한 자금 조달을 중단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것은 올 들어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이자 부담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용 등급 AA-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올 초 2%대였지만 7일엔 4.7%를 넘었다. 신용 등급 BBB- 3년물 금리는 10%를 웃돌고 있다. 회사채 발행이 위축되면서, 지난달까지 회사채 순발행액은 전년 동기보다 14조원 넘게 줄었다.

한 투자은행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투자 경쟁을 하는 기업들조차 유보금 활용으로 선회하며, 회사채 시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며 “현금 여유가 없는 저신용 기업들의 경우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고 유동성 위기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