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 삼성그룹이 전격 실시한 ‘7·4제’는 삼성과 우리나라 산업사(史)의 획(劃)을 그은 사건입니다. ‘7·4제’는 그해 7월 7일 일부 도입 후 닷새 후인 12일부터 모든 계열사로 확대된 ‘오전 7시 출근, 4시 퇴근제’로 2002년까지 9년간 시행됐습니다.
이 제도를 세계 최초로 창안한 이건희(李健熙·1942~2020) 회장(이하 이건희로 약칭)은 한달 전인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신(新)경영’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며 삼성 종사자들에게 모든 폐습(弊習)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하자고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신경영’, ‘7·4제’로 세계 1등 제패
이후 이건희는 8월4일까지 68일 동안 런던과 일본의 오사카·후쿠오카·도쿄를 오가며 350시간 임직원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말’로써 설득하는 동시에 출퇴근이란 시간·공간·육체적 변경으로 ‘의식혁명’을 밀어붙인 것입니다.
훤한 대낮인 오후 4시에 모든 사원들이 퇴근해 자기계발토록 하는 ‘7·4제’는 세계 기업 문화를 통틀어도 찾기 힘든 ‘파격’이었습니다. 1938년 삼성상회(三星商會)로 출발한 삼성그룹 역시 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야근을 미덕(美德)이자 경쟁력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7·4제’는, 삼성이 양적(量的)위주 성장·사고방식과 결별(訣別)하고 ‘질(質)’ 중심 선진 기업으로 웅비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개개인의 변화와 혁신을 촉구한 ‘신경영’의 생활판(版)인 이 제도의 위력은 상당했습니다. 한국의 삼류 제조회사였던 삼성전자는 9년 후인 2002년 일본 소니를 추월했고, 다시 7년 뒤인 2009년 매출액 세계 1위 IT기업에 올랐습니다.
◇“1992년 한 해에 체중 10kg 넘게 줄어”
한국의 많은 오너 경영자 가운데 어떻게 이건희만 이런 기발(奇拔)한 발상으로 기적적인 성취를 이뤘을까요? 의문을 푸는 세 가지 열쇠가 있는데 먼저 ‘절박감’입니다. 그가 생전에 유일하게 쓴 책 <이건희 에세이-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있는 구절입니다.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 한두 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전체가 사그라들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때는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 불고기를 3인분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대식가인 내가 식욕이 떨어져서 하루 한끼를 간신히 먹을 정도였다. 그해에 체중이 10kg 이상 줄었다.” (57쪽)
수면 시간을 뺀 20시간 동안의 행적에 대해 이건희는 1993년 한 강연에서 “작년 1월부터 내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작년 8월부터는 잠이 오지 않더라. 매일 책 보고 물어보고 조사시키고 했다. 10월부터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룹 총수로서 군림하거나 안온(安溫)한 삶은커녕 절박한 책임감으로 숱한 번뇌의 밤을 보냈다는 토로(吐露)입니다. 선친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타계한지 13일 만인 1987년 12월1월 열린 2대 회장 취임식에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발언은 한동안 ‘메아리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런 삼성의 현실과 세기말(世紀末)적 변화에 대한 위기감에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많았다.” (같은 책 56쪽)
‘말하기’ 보다 ‘듣고 침묵’하는 게 특기인 이건희는 1993년 내내 다변가(多辯家)로 변했습니다. 그 해에만 사장단 대상 800시간, 임직원 상대 350시간 등 총 1200여시간 강의를 했습니다. A4용지로 약 8500쪽, 200쪽짜리 책으로 42권 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는 “일류로 변해야 한다. 그럴려면 ‘나 자신’부터 질(質)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이건희 혁명’”
당시(1993년 10월~96년 12월) 회장 비서실장이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자서전 <위대한 거래>에서 “이 회장의 모습은 마치 목숨을 건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며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회장은 마치 전쟁터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군인(軍人)처럼 보였다. 정말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이건희 혁명’에 몸을 담가 개혁에 앞장서자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마 다른 사장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1993년 5월 이건희의 일정을 보면 ‘은둔의 경영자’라는 세평과 정반대였습니다. ‘중소기업 경영자 대상 강연(12일)→고려대학교 강연(15일)→KBS라디오 ‘경제전망대’ 출연(17~20일)→한국과학기술원 강연(26일)’…. 그의 78년 생애에서 가장 활발한 연속 공개 활동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필요하면 50년 넘게 굳어진 내 생활방식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그의 과단성과 결단력이 드러납니다. 그해 2월18일 미국 LA에서 사장단 대상 9시간 강의로 시작된 이건희의 ‘신경영 전도(傳道)’ 활동은 1년 넘게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며 공감(共感)을 샀습니다.
◇“서른 번이라도 찾아가 배워야 된다”
여기서 ‘지독한 공부’라는 두 번째 열쇠가 나옵니다. 이건희가 자신의 관점과 철학, 즉 내공(內功)을 오랫동안 쌓아오지 않았다면, 그의 강의와 신경영 추진은 중간에 흐지부지되거나 좌초됐을 겁니다. 그가 대충 겉핥기가 아닌 ‘눈에 불을 켠 공부’를 했다는 방증입니다. 이건희의 말입니다.
“부회장 시절인 40대일 때도 내 나이 또래든 내 나이보다 조금 많든 적든간에 나는 그들을 선생님으로 모셨다. 강의도 12시간, 20시간씩 받으면서 열심히 배웠다. 자기보다 지식이 앞선 사람한테 배울 때는 ‘삼고초려’의 정신으로 이쪽에서 머리를 숙이며 세 번 네 번, 안될 땐 서른 번이라도 찾아가서 배워야 된다.” (’삼성新경영’ 121쪽)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서울 한남동 그의 침실을 직접 가본 기외호 당시 비서팀장은 “책장은 물론 바닥에까지 각종 책과 자료들이 널려 있었고 침대 모서리에는 미국·일본에서 보내온 엄청난 영상 자료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야행성(夜行性)인 이건희가 매일 새벽까지 빼놓지 않고 이들을 봤다는 얘기입니다.
조용상 전 일본삼성 사장은 “이건희 회장은 일본인 기술 전문가들을 정말 극진히 대접했다. 당신 스스로를 낮추고 예의와 성의를 다하는 모습에 감동한 일본인 고문들은 삼성에 조언과 정보를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76~77쪽)
사실 이건희의 ‘지독한 공부’는 20대 후반부터 시작됐고 자신과 삼성, 나아가 대한민국의 명운(命運)을 바꾸었습니다. 이건희는 “1961년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로 유학가기 이틀 전 아버지로부터 ‘네 성격엔 기업이 안 맞는 것 같다. 매스컴이 어떻냐?’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1989년 12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수료후 1966년 귀국한 그가 처음 한 일은 삼성 비서실에 출근해 삼성 관련 신문기사에 빨간 줄을 쳐서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소년 시절 꿈도 별로 없었다. 대학 다닐 때 공부에 정말 취미가 없었다”고 말하는 재벌가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1967년 홍라희(1945~ ) 여사와 결혼하고 19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TBC) 이사로 경영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러나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이병철 회장과 고위 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가 1974년 4억원의 개인재산을 털어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게 한 증거입니다.
3년 만에 흑백TV용 트랜지스터를 만든 이 회사는 다시 3년 만에 칼라TV용 집적 회로를 만들었고, 또 다시 3년 후인 1983년 11월엔 64KD램 개발에 성공해 삼성의 반도체사업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20대 후반부터 ‘지독한 공부’ 계속”
그는 이 결정으로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선언한 아버지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삼성전자 연구원 출신인 김병완 작가는 자신의 책 <이건희 27 법칙>에서 이렇게 분석합니다.
“20대 중반까지 이건희는 공부보다는 영화나 개나 스포츠에 더욱 더 많은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삼성의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 모두 경영 능력 부족 등으로 눈밖에 나서 더 이상 삼성을 물려받을 적임자가 없다는 현실을 통감(痛感)한 이건희는 그때부터 지독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309~310쪽)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을 맡아 후계자로 공식화된 뒤에도 이건희는 외부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기 보다 집에서 경영·기술 관련 책을 읽거나 전자제품을 분해·조립하며 지냈습니다. 수시로 전문가들도 불렀습니다. 그는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 집에 초대해 한 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 수 백명을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골프와 파티를 즐기고 연예인들과 어울려 놀던 일부 재벌 2세들과 확연히 달랐던 것입니다. 이건희는 “맥주 반 컵만 마시면 두드러기가 나고 근지럽다”고 할 정도로 술을 못했습니다. 47세였던 1989년 12월 인터뷰에선 “술집에 1년에 두세 번 가면 많이 가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회장 취임후 공식 석상에서 외국인들과 와인 건배를 할 때도 미리 와인 색과 비슷한 음료를 컵에 담아놓았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김영삼 정권 시절 스페인 국왕의 방한(訪韓) 행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전날 밤을 새워 책을 읽고는 눈이 벌게져서 청와대에 간 적도 있다. 그의 방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의 것처럼 늘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술 중독자들이 밤새워 술을 마시는 것처럼 책 중독자인 그 역시 밤 새워 책을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건희의 서재’ 58쪽)
◇‘깊은 생각’과 ‘궁리’...입체적 사고
그의 다른 진면목(眞面目)이자 세 번째 열쇠는, 이건희가 ‘생각 중독자’라 불릴 만큼 ‘생각의 대가’(大家)였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사대부고 동기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은 생전에 “건희는 독특한 ‘세상 보기 안목’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한참씩 궁리해야 비로소 말뜻을 알아들을 때가 허다했다”고 썼습니다. 이건희는 1989년 12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배경을 털어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됐다. 그래서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먹으니 혼자 있게 됐다.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게 생각하게 됐다.”
1942년 1월 대구에서 출생한 직후 그는 경남 의령 본가로 보내져 네 살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5학년때 일본으로 유학간 것을 포함해 초등학교 시절에 6번 전학을 다녔습니다. 소년시절 일본에서 3년 살면서 극장에서 1200~1300편의 영화를 보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생각’하고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하는 습관을 키웠습니다.
한 예로 고독감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犬]와 가까이 지낸 그는 10년 넘는 연구와 현지답사 끝에 1983년 진돗개를 세계견종(犬種)협회에 공식 등록시켰습니다. 그는 승마·레슬링·휴대폰·농사기술·골프 등 무엇에겐 깊고 파고드는 집념과 끈기의 소유자였습니다. 터득할 때까지 온갖 책·자료를 섭렵했고 전문가에게도 물었습니다. 그는 ‘개박사’ ‘골프박사’ ‘휴대폰박사’가 됐고, 직관(直觀)과 통찰력(洞察力)이 몸에 배였습니다.
경영이나 일상사와 관련해 그는 최소한 다섯 번 정도 ‘왜?’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事]의 본질(本質)을 계속 캐물었고 의식적으로 입체적 사고를 했습니다. 이건희의 말입니다.
“나는 일하고 챙기는데 내 나름의 몇가지 원칙과 습관이 있다. 먼저 목적을 명확히 한다. 다음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악한다. 본질을 모르고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본질이 파악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어보고 연구한다.” (‘이건희 에세이’ 34쪽)
“오늘날처럼 모든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입체적 사고’가 필요하다. 영화를 감상할 때 주연, 조연 뿐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처지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인생까지 느끼게 된다. 감독, 카메라맨의 자리에서까지 생각하면서 보면 또 다른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으로 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 (같은 책 38~39쪽)
◇“21세기 경영자는 철학자의 경륜 필요”
본질에 대한 탐구와 성찰은 무수한 선문답(禪問答)을 낳았고, 이를 통해 이건희는 선지자(先知者)적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25년 전인 1997년, 이건희는 기술이 지배하는 ‘팍스 테크니카(Pax Technica)’ 시대를 예견했습니다.
“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과학기술이 부족하면 경제 식민지가 될 뿐 아니라 국가 안보마저도 남의 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19세기가 군사력, 20세기가 경제력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기술 패권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173쪽)
경영관(觀)도 여느 대기업 총수들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경영이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답한다.(중략) 나는 ‘경영은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경영의 뒤에는 탁월한 경영자가 있다. 21세기형 경영자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고 조직 내에 전파할 수 있는 철학자의 경륜(經綸)이 요구된다.” (같은 책 38·275·276쪽)
회사 출근 대신 그가 주로 자택에서 일한 것도 남다른 ‘생각’을 위한 몰입과 관련 있어 보입니다. 혼자만의 고독 속에서 그는 ‘신경영’ ‘7·4제’ ‘지역전문가제도’ ‘마하 경영’ ‘초격차 경영’ 같은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세부 실행은 김광호·윤종용·최지성·권오현 같은 전문 경영인들을 믿고 맡겼습니다. 제3세계의 변방 회사이던 삼성전자는 지금 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입니다. 1987년 2조원대이던 삼성전자의 매출은, 그가 타계한 2020년에 246조원대로 111배 늘었습니다. 삼성그룹의 시가총액은 같은 기간 1조원에서 719조원으로 비약했습니다.
◇선진국으로 이끈 義人...‘소명의 실천자’
그는 33년 전 취임식에서 한 약속 이상을 완수(完遂)하고 2년 여전 떠났습니다. 삼성의 도약을 지켜본 국민들까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자기 혁신에 힘쓰게 됐으니, 이건희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끈 ‘의인(義人)’이자 ‘소명(召命)의 실천자’입니다.
2022년 가을 세계 정치와 경제, 안보와 기술의 판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세계가 경제 양극화·대공황·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진영간의 혈투로 점철된 20세기 전반 30년(1914~45년)처럼 되어 간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위기일수록 시대를 앞서는 화두로 방향을 제시한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냉철한 나라사랑이 그립습니다.
그는 25년 전 “우리는 지난날 나라를 팔아먹은 이(李)완용을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지금 나야말로 김(金)완용, 박(朴)완용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자문(自問)해 봐야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이건희 에세이’ 127쪽)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회장께 다시 묻는다면, 그는 “모두 깨어나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생각하며 각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얘기하실 것 같습니다.
◇참고한 책
삼성 新경영(1993년), 이건희 에세이(1997년), 이건희(홍하상·2003년),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이지성·2009년), 이건희의 서재(안상헌·2011년), 이건희 27법칙(김병완·2012년), Samsung Rising(Geoffrey Cain·2020년), 경제사상가 이건희(허문명·2021년·이상 출간 순서 기준), 월간조선(1989년 12월호)
송의달의 모닝라이브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