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와 한전이 물가 상승 우려에도 작년 말 예고했던 전기 요금 인상분 외에 추가 인상을 검토하는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원유·가스 요금 폭등세가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한때 최고 우량 기업으로 꼽혔던 한전이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또 에너지 가격 폭등에도 올여름 최대 전력 수요가 사상 최대를 기록, 전력 소비까지 증가하자 전기 요금 현실화를 통해 과도한 전기 사용도 줄일 필요가 있다는 계산도 깔렸다.
정부는 가스 물량을 조기 확보해 올겨울 전력 수급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세계 각국이 천연가스 확보전에 나섰고, 우리나라 최대 가스 수입국 호주가 수출 제한까지 검토하고 있어 전기 요금 인상 요인은 겹겹이 쌓이고 있다.
◇2년 3개월 만에 35배 오른 국제 LNG 가격
19일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2020년 5월 MMBtu(열량단위)당 2달러를 밑돌던 동북아 LNG 현물 가격(JKM)은 지난달 말 70달러를 돌파했다. 유럽의 대(對)러 제재에 대한 반발로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밸브를 잠그며 유럽산 가스 가격이 급등하자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9월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출렁이면서 JKM 가격도 30~50달러 수준으로 하락했지만 20달러대였던 1년 전과 비교해서도 여전히 크게 비싼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한겨울이 되면 1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북반구가 겨울에 접어들며 난방용 수요까지 늘어나는 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종전이 요원한 가운데 LNG 가격 상승은 도시가스 요금은 물론 전기 요금까지 흔들고 있다. LNG 국제 가격 상승이 가스공사의 발전용 도시가스 요금을 끌어올리고, 발전사가 한전에 공급하는 전력 도매 가격까지 잇따라 치솟게 하고 있다. 전력 시장에선 원가가 가장 비싼 LNG 발전을 기준으로 도매 가격을 결정한다.
발전사는 지난해 2분기 ㎾h(킬로와트시)당 70~80원을 받고 한전에 전력을 공급했는데, 이달 들어 230원까지 급등했다. 하지만 한전이 가정이나 기업 등 전력 소비자에게 파는 전기 요금은 올해 두 차례 인상에도 120원 수준이다. 한전이 도입가의 절반 수준에 전기를 파는 셈이다.
산업부는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사들이는 전력 가격에 상한을 두는 제도 도입까지 검토했지만, 민간 발전사 반발이 커지자 시행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8월 월평균 최대 전력 수요는 8만375㎿(메가와트)로 작년 8월보다 4% 증가해 전력 소비는 계속 늘고 있다. 올겨울에는 지난 7월 7일 기록했던 사상 최대 전력 수요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다.
◇공기업 부실… 결국 소비자와 국민 부담
금융정보 제공 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들이 전망하는 올해 한전의 매출은 68조5676억원, 영업적자는 28조8423억원이다. 영업적자 규모가 매출의 42%에 이른다. 문제는 공기업인 한전과 가스공사의 부실이 회사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자가 쌓이자 한전은 지난 5월부터 매달 4차례 발전 자회사에 지급하던 전력 구매 대금을 한 차례 미룰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이른바 외상 거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회사채 발행도 막힐 처지여서 한국전력공사법을 개정해 발행 한도를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미봉책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전력 업계 관계자는 “한전 재무 구조가 악화하면 전기를 판매한 발전사에 제때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일까지 일어날 것”이라며 “결국 전력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전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해 증자를 통한 재정 지원 방안도 거론되지만, 한국·뉴욕 증시 상장사로 주주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많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낮은 전기 요금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는 것도 사용자 부담 원칙에 위배되는 문제가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업부도 전기 요금 인상·인하폭을 연간 ㎾h당 ±5원으로 제한해 놓은 연료비 연동제 규정을 바꾸거나 통상 연말에 한 차례 조정하는 기본요금을 대폭 올리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LNG 수급도 우려되는 상황에서 요금 인상이 수요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란 고려도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한전의 적자를 줄이는 방안을 두고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며 “요금 인상을 통해 고통을 분담하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