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13년 6개월 만에 1400원을 돌파했다.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환율이 전날보다 15.5원 오른 1409.7원을 보이고 있다. /오종찬 기자

위생용품 제조 중소기업 아이리녹스의 엄정훈(43) 대표는 최근 공장 가동률을 20% 이상 줄였다. 이 회사는 핵심 원자재인 천연펄프를 100% 수입하면서 달러로 결제하는데, 펄프 가격이 지난해보다 30~40%가량 뛴 데다가 환율까지 오르면서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엄씨는 “현금이 좀 있어야 원자재라도 싸게 결제할 텐데, 그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을 받으면 이자를 못 갚을 판”이라고 말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세 번째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을 강행하자, 국내 중소기업들은 초비상이다. 대기업도 죽을 지경이다. 최태원 회장은 21일(현지 시각) 워싱턴DC에서 열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워스트(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검토하고 있다. 지금은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 생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원자재 가격과 환율·금리가 동시에 폭등하는 것은 물론 전쟁 우려까지 겹치는 유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중소기업도, 스타트업도 돈맥경화

이익이 거의 나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까지 치솟으면서 자금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빚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부산에 있는 금속 표면 처리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2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이 코로나를 겪으면서 100억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며 “들어가는 비용은 크게 줄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은행 대출을 늘렸는데, 제대로 회복하기도 전에 대출 금리가 오르면 갚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중견 식음료 제조 업체의 자금 담당 임원은 “우리 회사 당기순이익이 150억 이내인데 이자 비용만 100억이 넘는다”며 “그나마 과거 받아둔 고정금리 덕분에 평균 4%대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나, 이자 쌓여가는 속도도 무시 못 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전기료뿐 아니라 도시가스, 난방비, 상수도료 등 공공요금이 모두 뛰면서 중소기업의 비용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경기 화성에서 전기 설비를 제조·설치하는 중소기업 A사 직원 문모(32)씨는 “코로나 때문에 안 그래도 지난 3년간 회사가 어려웠는데, 핵심 고정 비용인 전기료가 오르면 그대로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소기업계는 올 연말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면 폐업으로 내몰리는 중소기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스타트업 업계도 심각한 돈맥경화 현상을 겪고 있다. 공작기계 공유 서비스를 운영하는 한 스타트업 대표는 “작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고 러브콜 많이 받았는데 올해 들어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며 “투자를 받으려 여러 군데 뛰어다녀도 문전박대 당하고, 은행 문턱도 높아 대출 받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미국 3연속 자이언트 스텝에 대기업도 비상

대기업은 그마나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금리 인상·환율 급등 문제와 관련, “제일 무서운 것은 언노운(unknown), 불안이다. 금리를 어디까지 올릴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도 “매년 위기론이 나오지만, 특히 올해는 더 힘든 것 같다”며 “코로나 이후 공격적인 해외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고환율에다가 금리 인상까지 겹치다 보니 원점에서 경제성을 다시 검토하라는 그룹 차원의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TV·냉장고 등 가전 업계는 소비 심리 위축으로 벌써 재고가 급격하게 쌓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6월 말 기준 재고는 작년보다 무려 10조7000억원이 늘어난 52조900억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50조원을 돌파했다. 또 상장 기업 750곳의 올해 상반기 총 부채는 806조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700조원에 비해 15% 이상 늘었다. 특히 1년 미만 유동 부채가 크게 증가해 기업 경영에는 더 악영향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