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로 탄소 중립 제철, 이른바 ‘그린 스틸(green steel)’ 기술이 급부상하고 있다. 철강 제조 과정에서 쓰이는 석탄을 수소로 대체해 탄소 발생을 ‘0′으로 줄이는 것이 그린 스틸의 핵심. 기존에는 탄소 배출을 줄여주는 친환경 기술로 주목받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이슈로 석탄 수요가 급증하고 가격도 몇 배 뛰자 불안정한 에너지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로 재조명 받으며 글로벌 산업계의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요아킴 누네스 데 알메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산업 담당 총국장은 12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2회 수소 환원 제철 국제 포럼’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석탄을 쓰지 않는) 탄소 중립 제철 기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로 천연가스와 석유는 물론 석탄까지 대부분의 화석 연료 공급망이 불안해지고 가격도 급등한 데 따른 것이다. 그는 “기존처럼 석탄을 쓰는 제철 공정으로는 기후 변화는 물론, 달라진 국제 에너지 시장 구조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말 1t당 150달러 선에 머물던 석탄 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450달러대로 3배나 뛰었고, 현재 390달러선을 유지하고 있다.
제철 산업에서 석탄은 필수불가결한 재료다. 용광로 속에서 타면서 철광석을 녹이는 에너지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의 철(산화철)을 순도가 높은 철로 만드는 환원제(還元劑)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철강 1t당 약 2t꼴로 대량의 탄소 가스(이산화탄소)가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이를 막기 위해 석탄의 에너지원 역할은 수력·풍력·태양광 기반의 친환경에너지로, 환원제 역할은 수소로 대신하는 것이 그린 스틸 기술의 핵심이다. 현재 스웨덴 철강회사 SSAB가 개발 중인 ‘하이브리트(Hybrit)’ 기술과 포스코가 개발한 ‘하이렉스(HyREX)’ 기술이 2파전을 벌이고 있다.
이날 수소 환원 제철 국제 포럼에서는 전 세계 51개국에서 390여개 제철·철강 기업과 철강 제품을 사용하는 기업 대표 1000여명이 참여해 그린 스틸 기술에 부쩍 높아진 관심을 드러냈다. SSAB의 마틴 페이 최고기술책임자(CTO)는 “SSAB의 하이브리트 기술은 (기존 용광로와 유사한) 샤프트 환원로(shaft furnace)라는 검증된 방식을 이용, 이미 시간당 1톤의 그린 스틸을 생산할 수 있는 시험 설비까지 구현했다”며 “현재 가장 앞서 있는 그린 스틸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브리트는 그러나 고품질의 철광석만 쓸 수 있고, 이를 또 ‘펠릿(pellet)’이라는 덩어리 형태로 가공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SSAB는 2026년도에 그린 스틸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고, 2030년도에 대량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에 맞선 포스코의 하이렉스 기술은 이 회사가 자랑하는 ‘파이넥스’ 제철 공법을 응용한 것으로, 뛰어난 경제성과 효율성이 강점이다. 산화철을 순도가 높은 철로 바꾸어주는 환원 과정에 석탄을 태울 때 나오는 일산화탄소(CO) 대신 수소를 사용한다. 포스코 주세돈 부사장(기술연구원장)은 “파이넥스 공법의 장점을 그대로 이어받아 저렴한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쓰기 때문에 원료비가 적게 들고, 대량의 철을 생산하는데 더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포스코는 2028년까지 연간 조강 능력 100만톤짜리 하이렉스 시범 생산 설비를 만들어 가동하고, 2030년 이후 본격 상용화에 나설 예정이다.
SSAB와 포스코는 이날 포럼을 통해 그린 스틸 기술 확산에 지속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또 제철 설비 업체는 물론 친환경 에너지 기업, 철광석 등 원재료 공급 업체, 철강 수요 업체들과 손잡고 각자의 기술 생태계를 적극 육성해 갈 예정이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철강 업계 고위 인사는 “2050년 탄소 중립 목표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고, 에너지 시장의 불안까지 가중되면서 제철 업계에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며 과감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동 포스코 대표(부회장)는 “국내외 다양한 기업과 연구개발(R&D) 파트너십을 확대, 하이렉스 기술 확산을 위한 ‘열린 혁신의 장(open innovation platform)’을 만들겠다는 것이 포스코의 장기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하이렉스라는 이름이 미래 철강 기술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포스코의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