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는 다음 달부터 워룸(War-room·전시작전상황실)을 만들기로 했다. TV 등 주요 제품 수요 위축의 직격탄을 맞은 LG전자는 내년 경영 환경이 더 악화될 것으로 보고 각 사업부와 본사의 핵심 직원들을 모아 경영 현황 점검과 대책 수립에 나서기로 했다. 최근 제주도에서 열린 SK그룹 CEO 세미나 분위기도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은 이 자리에서 “위기가 올 거 같다. 중국·대만 관계, 북한 핵실험 등 지정학적 요인까지 겹쳐 자금 경색이 더 심해질 수 있다”며 각 계열사 CEO들에게 위기 관리 매뉴얼을 준비하라고 강하게 독려했다.
레고랜드에서 촉발된 자금 경색이 급속히 확산되자 대기업도 비상이 걸렸다. 주요 그룹들은 올해 급격한 금리 인상 여파가 6개월 뒤 본격화되면 이미 하강 국면으로 접어든 경영 실적이 내년에는 더 고꾸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여기에 더해 시장 자금마저 급속하게 얼어붙자, 계열사별 자금 상황을 일단위로 점검하면서 기업 줄도산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다.
◇워룸 만들고, 투자 줄이고, 단기 자금 끌어 쓰고, 흑자 도산 우려까지
포스코그룹은 지난달부터 주요 계열사 CFO(최고재무책임자)들이 2주에 한 번 모여 비상경영대응팀 회의를 열고 있다. 환율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금리 인상 폭이 커지자, 계열사별로 재고 자산과 회사채·대출 현황을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운용 자금 관리에 나선 것이다. 삼성그룹도 계열사별 회사채 현황 파악에 나섰고, 롯데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최근 자금 이슈가 발생했던 롯데건설에 대해 자금 운용 상황을 매일 보고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대기업은 대규모 투자 계획을 연기하거나 철회했다. 현대차는 24일 “올해 투자 계획을 연초 9조2000억원에서 대외 변동성 확대에 따른 유동성 관리 차원에서 8조9000억원으로 하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도 최근 4조3000억원 규모의 청주 신규 반도체 공장(M17) 증설 투자를 보류했고, 한화솔루션도 지난달 1600억원 규모의 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했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 같은 금리·자금 상황에선 10~20% 이상의 영업이익률을 보장할 수 없으면 차라리 신규 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긴축 경영에 속속 뛰어들었지만,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저금리 상황에서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은 이미 역대 최대 규모(지난 6월 말 532조5193억원)다. 작년 말보다 54조3447억원(11.36%) 급증해 통계 작성 이래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긴급 공급하기로 했지만, 기업들 사이에서는 “어림도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시장 자금이 풍부해 여러 가지 사업을 공격적으로 진행했는데, 갑자기 자금 시장이 경색되다 보니 빌려 놓은 대출을 제때 갚지 못하는 ‘흑자도산’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건설 업계 위기감 최고조… 지방에선 ‘줄도산’ 공포
효성그룹 계열사인 효성화학·효성중공업 등 대기업도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자 최근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겨우 자금을 조달했다. 신용보증기금의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중소기업이나 자금 사정이 열악한 기업이 쓰는 자금 조달 방식이다.
건설업계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금리가 올라 자금 조달 비용이 커졌는데 미분양은 가파르게 늘고 있어, 일부 현장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연쇄적으로 돈줄이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7000억원대 자금을 계열사 유상증자와 차입으로 조달한 롯데건설 같은 대기업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지방 건설사 상황은 더 심각하다. 대구에서 아파트를 분양 중인 한 중견 건설사 대표는 “80% 정도가 미분양 상태인데,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며 “대출 연장이 되지 않으면 1년도 못 버틸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