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처음으로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에 처했다.”(비롤 국제에너지기구 사무총장), “최악의 경우 올겨울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한 정전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야네스 레나르치치 EU 위기관리 집행위원).
에너지 위기에 대한 각종 경고가 쏟아지는 가운데 유럽은 물론 산유국인 미국도 예외 없이 에너지 허리띠 조이기에 나섰다. 유럽에선 담요·이불·내의·실내 슬리퍼가 불티나게 팔리고, 난방에 쓰는 장작과 목재 스토브는 품귀 현상이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프랑스 에펠탑, 벨기에 왕궁 같은 유명 관광지의 밤을 밝히던 야간 조명은 꺼졌다. 크리스마스 조명도 올겨울에는 대폭 축소될 예정이다.
일찌감치 에너지 절약에 나선 EU(유럽연합) 27회원국의 상반기 전력 소비는 작년보다 0.51% 감소했다. 반면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나라는 8월까지 전력 소비가 4%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를 에너지 다소비 구조를 바꾸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를 통한 변화의 기회를 낭비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에너지를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당장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장기적으로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과 국민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에너지 많이 쓰고 막 쓰는 나라
한국은 세계에서 8번째 에너지 다소비국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의 1.7배가 넘는다. 10년간 OECD 회원국의 에너지 소비가 연평균 0.2% 감소하는 사이 우리나라는 연 0.9%씩 늘었다. 지난 40년 5배 증가한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는 2018년 정점을 찍고 2019~2020년 2년 연속 감소했다. 하지만 지난해 11년 만에 가장 높은 5.4%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올해도 2% 넘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력만 놓고 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전체 소비는 4위, 1인당 소비는 5위다.
제조업 중심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에너지 소비가 느는 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독일이나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이지만 이미 GDP(국내총생산)가 늘어도 에너지 소비는 감소하는 탈(脫)동조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우리나라 GDP가 105% 성장할 때 에너지 소비는 4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일본, 독일은 GDP가 각각 16%, 26% 성장할 때 에너지 소비는 각각 17%, 4% 감소했다. 두 나라는 경제성장에도 효율을 높여 에너지 소비를 줄였지만 우리나라는 에너지 다소비 구조로 고착하고 있다.
GDP 대비 에너지 소비량인 에너지 원단위도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35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에너지 원단위는 경제활동에 투입된 에너지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지표다. 에너지 원단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단위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데 에너지를 더 많이 쓴다는 의미다. 미국 EIA(에너지관리청)는 2050년까지 우리나라 에너지 원단위가 연평균 0.4%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OECD 평균(-1.1%), 전 세계 평균(-1.5%)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에너지 위기 효율화 계기로”
정부가 그동안 에너지 정책을 공급 늘리기에만 우선을 두고, 에너지 절약이나 효율을 높이는 데는 무관심하면서 에너지 과소비를 방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지난 정부에서는 탈원전과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대표되는 에너지 전환에 집중하면서 에너지 수요를 줄이는 데는 관심이 낮았고 성과도 저조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에너지 공급 부문 예산은 연평균 13% 증가했지만, 에너지 효율화 예산은 제자리걸음 수준의 증가(0.04%)에 그쳤다. 탈원전을 이유로 전기요금 인상을 누른 것도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긴 이유로 꼽힌다.
현재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과거 IMF 외환 위기 때 구조 조정이라는 고통을 통해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처럼 이번 에너지 위기도 효율을 높이고 새로운 소비 문화가 자리 잡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에너지 효율(energy efficiency)
같은 양의 일을 수행하거나 결과를 만들기 위해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GDP 단위 생산에 투입되는 에너지양이 적을수록 에너지 효율이 높다.